감춰진 풍경 - 민병헌 사진전 (2004. 9.4 - 10. 16)
민병헌의 신작 사진을 한미 갤러리에서 만날 수 있다. 이번에 선보이는 그의 사진들은 80년대 이후 일관되게 작업해 왔던 풍경사진의 후속이다. 초기 사진들에 붙여진 제목 ‘별거 아닌 풍경’이 암시하듯 그는 사진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는 행위를 쑥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런 태도는 그의 사진에 나타나는 사물들이 자신을 수줍게 펼쳐보이게끔 만든다. ‘별거 아닌’ 사물들을 어떤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처럼 드러내는 것이 쑥스러운 것이다.
이번에 전시되는 사진들에서도 역시 그와 유사한 태도가 조금 다른 방식으로 변형되어 나타나고 있다. 작가는 수줍음의 시각이라고나 부를 수 있을 법한, 종래에 자연 풍경을 보여주어 왔던 태도를 약간 수정하여 이번에는 사물들을 감추려 한다. 그것은 수줍음이 한결 심화된 형태이다. 어두운 흑색 톤 뒤로 숨어버리는 자연의 모습을 온전히 알아차리기 위해서 관객들은 약간의 수고를 감내해야 한다. 어둠은 어둠으로 감추고 밝음은 밝음으로 감추는 작가의 인내어린 땀 냄새를 그렇게 해서야 맡을 수 있다. 하지만 감춘다고 해서 제대로 감춰지겠는가? 사진이 사물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면 그의 사물 감추기는 일종의 놀이에 가깝다. 다시 말해 작가는 온전히 감출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온전한 감추기는 결국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자신의 작업을 감추기 놀이가 아니라 보이기 놀이로 만드는 미세한 장치들을 마련해 놓는다. 마치 술래인 어린 아이가 아무 자취도 남기지 않고 숨어버린 친구들 앞에서 난감해 할 때 숨바꼭질은 놀이로서의 재미를 잃어버리듯이, 놀이가 즐겁기 위해서는 숨은 아이의 옷깃 하나라도 보여야 하며 하물며 어디 숨어있는지 짐작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 흥미와 긴장은 거기에서 나온다. 민병헌의 감추기 놀이는 그래서 감춤의 원칙에서 보자면 서툰 감추기이다. 하지만 감추기란 본래 서툴러야 하지 않겠는가? 완벽한 감추기는 속임수이자 상대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어둠의 사이사이에서 간헐적으로 희미하게 드러나는 사물들은 그래서 감추기의 폭력을 억제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감추기와 드러내기 사이의 균형이 어긋나 한 쪽으로 쏠린다면 어설픈 감추기, 혹은 적나라한 드러내기가 될 터이고, 그것은 작가가 싫어하는 방식이다.
작가는 어둠으로 감추는 데에는(그것이 가장 일반적이고 손쉬운 방법이므로) 이미 흠잡을 데 없는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밝음으로 감추는 작업은(그것이 가장 어려우면서 동시에 상식, 혹은 원리를 부수는 방식이므로) 실행해 옮기고는 있지만 때때로 주저하는 듯 해 보이기도 한다. 사물 감추기가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는 과시(誇示)의 어리석음을 피해서 최소한만을 보여주려는 현명한 보여주기의 길이라면, 작가의 감추기 작업은 겸손한 보여주기이다. 수줍음과 겸손을 작업의 방법론으로 삼은 작가가 상식과 원리에 맞서는 행위를, 다시 말해 빛에 맞서는 행위를 주저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밝음이 항상 사물을 보여주는 데 있지만은 않고 과도한 밝음은 때로 그것을 감출 수도 있음을 작가는 지혜롭게 터득하고 있다. 밝음으로 감추기는 그러한 밝음의 맹목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작가는 오히려 어둠은 드러내기의 방법론으로, 밝음은 감추기의 방법론으로 교묘한 역전을 시도하기도 한다. 어둠 속에서 더욱 잘 드러나는 사물이 있음을, 반대로 밝음 속에서 효과적으로 숨는 사물이 있음을 그는 구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업에서 감추기와 드러내기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감추기로 그의 작업의 틀이 이동하고 있다면 그는 이제 치열한 싸움터로 접어들고 있는 셈이다. 수줍게라도 드러내는 것은 싸움을 피하는 것이지만 적극적인 감추기는 이제 드러내 보여주기라는 시각예술의 거대한 원칙에 맞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싸움은 시각의 가치를 취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시각 개념을 상대화시켜 그것의 새로운 가치를 찾기 위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감추기 놀이는 보여주기의 확장이자 심화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