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테크놀로지는 등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 시대의 문화지형을 빠른 속도로 변화시켜 왔다. 이 테크놀로지에 기초한 문화는 이제 기계 마니아들만이 향유하는 특수한 문화가 아니라 우리 시대 전체의 문화로 확산되었다. 바야흐로 디지털 문화의 시대가 열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인터넷과 스마트폰, 아이패드 등 디지털 문화를 이끌어 나가는 하드, 소프트 웨어의 영역에서 사진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사진 없는 디지털 문화란 상상하기 어렵다.
여기에는 사진이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통해 아주 쉽게 생산, 유통될 수 있다는 점이 주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누구나 디지털 카메라로 원하는 사진을 찍어 파일 상태로 보관할 수 있으며, 마음에 드는 사진을 타인과 주고받을 수 있다. 인터넷의 가상공간에 그 사진을 올려 대량으로 유통시킬 수도 있으며, 타인의 사진을 함께 공유할 수도 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클릭 한번으로 사진을 ‘제거’해 버릴 수도 있고, 마음이 바뀌면 다시 ‘환생’시켜낼 수도 있다. 손오공의 마법처럼 같은 사진을 대번에 여러 장 복제해낼 수도 있고, 크기를 마음대로 키우거나 줄일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원본(데이터로 존재하는)의 품질은 전혀 훼손되지 않는다. 예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다.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사진의 생산과 유통에 미친 영향은 다양한 각도에서 검토해 볼 사안이지만, 우선 복제의 측면에서 생겨난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벤야민이 사진 복제가 가져온 문화사적 변화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과 관련하여 다시금 우리 시대의 복제문화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지 않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디지털 복제는 기존의 아날로그적 사진 복제와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차이는 일상에서부터 예술작품의 생산과 수용, 특히 ‘예술로서의 사진’에 이르기까지 주목할 만한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먼저 아날로그 시대의 사진 복제가 어떤 형태로 이루어져 왔는지 살펴보자. 최초의 복제 시스템을 고안했던 이는 영국인 탈보트이다. 탈보트보다 먼저 사진술 발명자라는 영예로운 지위를 얻었던 이는 니에프스의 연구를 발전시킨 다게르였지만, 그가 고안했던 다게레오타입은 복제가 불가능했다. 반면 탈보트의 칼로타입은 종이원판에서 여러 장의 사진인화를 복제해 낼 수 있어 오늘날의 사진 복제시스템을 처음 실현시킨 방법이었다. 그런데 칼로타입은 불투명환 종이원판을 사용하는 까닭에 신속하게 복제를 해내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복제를 계속해낼 때마다 종이원판이 훼손되어 복제할 수 있는 양에도 한계가 있었다. 칼로타입의 복제력이 비약적으로 증대된 것은 두 가지의 기술적인 개량 덕분에 가능했다. 공식적으로는 1851년에 개발된 밀랍지법과 알부민법이다. 전자는 종이원판에 밀랍을 입혀 종이의 공기구멍을 막아 이미지의 선명도를 높이고 원판의 표면에 견고성을 부여했다. 후자는 감광도를 높여 한 장의 원판에서 하루 500장 정도의 인화가 가능하도록 했다. 알부민 인화는 초기의 칼로타입이 지녔던 복제력에 비하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이지만 이를 두고 벤야민이 언급한 ‘전시가치’가 대번에 실현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전히 복제의 양에는 제약이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무한복제가 가능해진 것은 사진인쇄, 특히 망판인쇄술이 보급되면서부터이다. 이전에도 사진인쇄는 가능했지만 활자와 함께 인쇄할 수 없어 실용화에 이르지는 못했다. 반면 활자와 사진을 동일지면에 인쇄할 수 있는 망판인쇄가 등장하면서 사진은 세계를 뒤덮게 되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사진을 볼 수 있는 세상, 역으로 말하자면 어디를 가더라도 사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세상, 그야말로 사진의 편재(遍在)가 시작된 것이다. 벤야민이 언급한 기술복제 시대는 바로 이처럼 사진의 무한복제와 더불어 열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무한복제에도 한계는 있다. 우선 사진의 생산자, 그리고 그 사진을 복제하는 주체가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감광도가 높은 건판필름과 자동카메라는 사진의 생산자 층을 잠재적으로 광범위하게 넓혀놓았지만 복제를 통해 만나게 되는 사진의 생산자는 여전히 ‘특별한’ 소수였다. 이는 복제의 주체가 일반 대중이 아니라 매체였기 때문이다. 즉 한 장의 사진은 그 사진을 ‘활용’하고자 하는 매체의 방침과 부합할 때만 복제될 수 있었다. 요컨대 복제 가치가 있는 사진을 찍은 자만이 사진의 진정한 생산자일 수 있었다. 그렇지 않은 경우 사진은 사진가의 손을 떠날 수도, 복제될 수도 없으며, 결국 그 사진가는 사진의 ‘생산자’일 수 없었다. 둘째, 복제된 사진 이미지의 수용자는 단지 수용자일 뿐, 그 사진을 다시 복제해낼 수 없었다. 물론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사진을 카메라로 다시 찍어 복제해낼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을 복제라고 하기는 어렵다. 복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과정 자체가 곧 현실의 피사체를 촬영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복제 이미지의 품질이 원본보다 못하다면 복제 행위는 훨씬 쉽고 간편해야 한다. 그래야 복제의 가치가 생긴다. 하지만 이 경우 촬영 행위와 복제 행위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셋째, 촬영을 통해 얻어낸 복제 이미지는 원래의 원본에 비해 품질이 낮다. 이 차이가 아무리 미세하다 할지라도 물리적인 차이는 반드시 발생한다. 아날로그 방식이기 때문이다. 즉 아날로그는 유사를 속성으로 삼고 있는 탓에 반드시 원본과 다르다. 복제가 거듭될 때마다 품질은 낮아져 원본이 갖고 있는 정보는 상당 부분 훼손되는 것이다.
한편 디지털 복제는 아날로그 방식의 복제가 갖고 있는 이런 단점을 대부분 극복할 수 있다. 먼저 품질의 문제. 아날로그 복제에는 원본이 있다. 복제를 가능케 하는 무엇, 즉 복제가 시작되는 지점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다. 복제물과 원본의 차이가 거의 없더라도 복제의 대상은 있는 것이다. 사진 복제의 경우 필름이 원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디지털 복제의 경우는 원본과 복제본의 물리적 차이 없이 무한 복제가 이루어진다. 때로 복제본이 원본이 되기도 한다. 이는 디지털 사진의 원본이 이미지가 아니라 데이터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미지는 유사를 토대로 하지만 데이터는 숫자를 근간으로 삼는다. 숫자는 유사를 배제하므로 조금만 달라져도 다른 데이터, 즉 다른 이미지가 된다. 따라서 데이터 상태로 복제되는 디지털 이미지는 원본과 복제의 구분이 없다. 결국 디지털 복제의 경우 모든 복제본의 품질은 동일하다. 둘째, 디지털 사진의 생산자, 그리고 그 사진을 복제하는 주체는 특권을 부여받은 자들이 아니다. 이 문제는 결국 이미지의 유통과 긴밀히 연계되어있다. 아날로그의 경우 복제 가치가 있는 사진은 한정되어 있으며, 복제의 주체 또한 그렇다. 사진 복제에는 일정한 시간과 경비가 소요되므로 복제할 사진은 소수로 한정된다. 즉 복제의 목적이 분명할 경우에만 복제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디지털 복제의 경우는 시간도, 경비도 필요치 않다. 또한 거기에는 특별한 목적이 없다. 디지털 복제는 오히려 유희적이다. 누구나 특별한 목적 없이 사진 복제를 행하는 것이다. 이제 복제는 정치적, 사회적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유희를 위한 것이 되었다. 복제 본을 만들었다가 언제라도 파기할 수 있고, 다시 또 복제해 낼 수 있는 것이 오늘날의 복제문화이다. 셋째, 디지털 복제는 모든 정보를 사진이미지로 환원시켜낸다. 원본이 사진인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그림이나 만화, 심지어는 문자 텍스트마저도 사진 복제라는 매개를 거쳐야만 ‘정보’가 된다. 즉 우리가 디지털 복제를 통해 접하는 모든 정보는 사진을 기본 단위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플루서가 ‘선형문자’라 불렀던 것마저도 ‘기술 이미지’로 변환시켜 정보로 받아들인다. 그야말로 디지털 복제가 창궐하는 시대이다.
이런 조건에서 예술작품, 특히 사진은 다시 한 번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변화는 매우 복잡하게, 그리고 불명료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우선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문제들 몇 가지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우선 처음으로 사진 복제의 문제를 언급한 벤야민을 따라 디지털 복제 시대의 ‘전시가치’에 대해 살펴보자. 이 문제는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첫째, ‘사진작품’이 전시장에서 관객과 만나는 경우와 둘째, 이 작품이 ‘복제 이미지’로 가상공간에서 유통되는 경우이다. 첫 번째 경우 ‘사진작품’은 여전히 ‘전시가치’보다는 ‘제의가치’에 묶여있다. 사실 전시장에 ‘입성’하는 ‘사진작품’은 대부분 디지털 방식으로 출력되어 벽에 걸린다. 그런 점에서 이 사진들은 첨단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단지 인화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결국 아날로그 방식과 근본적으로 유사하다. 여전히 전시장이라는 공간의 ‘특별한 의미’에 집착하고 있으며, 결국 ‘전시가치’를 위한 공간이 ‘제의가치’에 매달려 있다 하겠다. 왜냐하면 미술관이나 상업갤러리에 전시된 사진은 관람자에게 복제품이 주지 못하는 특별한 경험을 제공해야 하며, 그 경험은 바로 그 장소에서만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설혹 그 ‘작품’에 ‘전시가치’가 있더라도 전시장을 찾는 이들의 수는 제한적이어서 무한복제를 통해 증폭하는 이미지들의 ‘전시가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미술관을 통해 유통되는 ‘사진작품’들이 ‘전시가치’를 극대화시키려면 전시장을 버리고 복제이미지에 의존하여 가상공간을 배회해야만 하는가? 이 경우 사이버 갤러리의 가능성이 아직 남아있다.
두 번째의 경우, 복제된 ‘사진작품’은 무수히 많은 불특정 다수의 관람자와 만날 수 있다. 그야말로 ‘전시가치’가 극대화되는 셈이다. 그런데 이 복제 이미지들은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진짜 작품’에 비하면 품질이 훨씬 낮다. 따라서 심미적 체험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 복제 이미지들이 제공하는 경험의 두께는 매우 얇은 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품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대개의 관람자들은 전시장 벽에 걸린 ‘사진작품’을 ‘사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로 받아들인다. ‘사물’이 제공하는 미세한 결을 감각적으로 더듬어나가면서 풍요로운 체험으로 확장시키기보다는 무엇이 찍혔는지, 사진가는 그것을 왜 찍었는지, 그 이미지는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더 큰 관심을 보인다는 말이다. 이 경우 사진의 물리적 품질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인터넷의 가상공간에서 볼 수 있는 복제이미지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많은 ‘사진작품’들이 저용량 디지털 데이터로 복제되어 가상공간을 둥둥 떠다니고 있다. 전시홍보용으로 신문, 잡지, 인터넷 매체에 제공한 데이터나 그 밖의 목적으로 만들어낸 디지털 이미지가 불특정 다수의 관람자들 사이에서 무한 복제되는 것이다. 이런 복제에는 기원도 없고, 원본도 없으며, 말하자면 복제본도 없다. 서로가 서로를 복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제의 목적 또한 없다. 단지 복제를 위한 복제, 혹은 유희로서의 복제일 뿐이다. ‘전시가치’가 ‘유희가치’로 옮겨간다 하겠다.
디지털 복제가 야기한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는 복제의 원본이 되는 사진의 물질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날로그 시대의 사진가들은 복제 이미지(오리지널 프린트라 불리는)를 필름이라는 물질로부터 얻어냈다. 그 물질의 권위는 확고부동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 없이 오리지널 프린트라는 또 다른 물질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 후자로서의 물질(복제품)이 원본으로서의 물질(필름)을 압도한다는 것이다. 원본으로서의 물질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서 자산가치가 높은 복제품으로서의 물질을 얻어낼 수 있는 한에서였다. 그런데 이제 이 원본으로서의 물질은 디지털 데이터에 자리를 넘겨주고 있다. 사진가들이 오리지널 프린트라는 복제품을 만들어낼 때의 원본은 디지털 데이터이다. 디지털 팩을 사용하여 애초부터 데이터 상태로 시작하거나, 필름으로 촬영하여 그것을 다시 디지털 스캔하여 데이터로 변환시키기 때문이다. 즉 디지털로 출력한 모든 사진들의 원본은 물질성이 없는 디지털 데이터이다.
위에서 살펴본 몇 가지 현상들은 비록 징후에 불과하지만 예술작품의 생산과 유통, 보존 등 다양한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이 변화의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 것인지는 성급히 예단할 수 없다. 다만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진화가 무섭게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이 일상에서부터 대중문화, 예술의 지형과 생태계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 또한 그렇다. 디지털 복제는 아날로그 사진 복제나 ‘기술 이미지’의 등장이 야기한 변화 못지않게 큰 지각변동을 가져 올수도 있다. 어쩌면 그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거나 진행 중인지도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