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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0/06/01 분단 문제, 특수한 사안인가?
  3. 2010/02/27 좋은, 살인 (2)
  4. 2009/12/15 SKOPF 2009 (2)
  5. 2009/11/16 망월동
  6. 2009/11/03 다큐멘터리 사진
  7. 2009/10/13 무례한 복음 (2)
  8. 2009/08/06 13인의 아해
  9. 2009/06/17 노순택 (1)

ReallyGood, Murder

사진 2010/12/01 02:09

생명주권을 빼앗긴 야생 인류의 생태학

<좋은, 살인> 연작에서 노순택은 전쟁무기의 살해 위협이 상존하는 우리 시대의 생태학에 대해 탐색하고 있다. 위험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는 위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모습은 태연자약하기 그지없어 오히려 희극적으로 보인다. 이는 그들이 전쟁무기의 실체를 망각하고 있으며, 나아가 스스로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모른 채 그 상황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각종 무기 쇼와 가상의 전쟁연습이 웅대한 스펙터클처럼 펼쳐질 때 그들은 환호한다. 그 환호성의 이면에는 가상의 ‘적’을 이 첨단 무기들이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섞여있을 것이다. ‘적’이란 개념적으로 ‘악의 축’에 속해 있어 그들과 맞선 전쟁은 ‘선한’ 행위처럼 인식된다. 전쟁무기의 강력한 화력은 선한 편의 승리를 힘들이지 않고 가져다줄 수 있으므로 찬탄의 대상이 된다. 작가의 문제의식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원한다.

전쟁무기는 생명을 살상하는 기계이다. 살상의 대상이 아군이냐 적군이냐는 여기에서 중요하지 않다. 칼 쥔 자가 누구냐에 따라 희생자가 달라질 뿐이다. 그래서 모든 무기는 양날의 칼이다. 문제는 이 무기가 자신을 밸 수도 있는 칼이라는 점을 좀처럼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요컨대 살상의 대상과 상관없이 무기란 본래 위험하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무기가 존재하는 한 생명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이 무기의 성능이 고도화되어 갈수록 위험은 그에 비례하여 커진다. 생명 주권은 전쟁무기를 생산해 내는 세계 속에서 박탈당한 상태이다.

분단 상황이 반세기 이상 지속되고 있는 우리의 상황은 명목상으로는 ‘휴전’ 상태이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단지 잠시 멈추었을 뿐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전쟁의 위험은 남아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이 연작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휴전 상태를 위기로 인식하지 않는 듯하다. 가공할 화력의 각종 무기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거나 모의 전쟁을 보며 환호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이 전쟁무기들이 자신들의 생명주권을 보호해주는 국가권력에 속해있다는 믿음에서 오는 안도감 때문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믿음에 잘못은 없다. 그러나 만약 총구가 그들 자신을 향한다면 어쩔 것인가? 기념사진을 찍어주는 아빠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아이 사진(2008, 충청도)에서처럼 말이다. 자식은 부모에게 ‘총을 쏘고’, 부모는 자식에게 ‘사진을 쏘는’ 이 장면은 언제라도 발생할 수 있는 위기상황에 대한 메타포이다. 이러한 위급한 사태는 전쟁무기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가능성으로 남아있다. 실제로 개인의 생명주권이 국가권력에 의해 위협받았던 경우는 우리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경험들로 남아있다. 그 때 무기는 살해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무기는 본질적으로 살해의 수단이지 생명을 보호하는 도구가 못된다. 또한 임시적으로 국가권력에 속해있을 뿐이지 궁극적으로는 개인들의 보호 장치가 될 수 없다.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조항에 따르자면 개인들은 이 전쟁무기를 국가에 잠시 위탁했을 뿐이다. 법의 권위를 믿어서인지 살해도구를 위탁한 이들은 그 도구가 자신들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굳이 현대사의 통렬한 경험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전쟁무기가 곧바로 모두의 생명주권을 박탈할 수 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다.

무기는 전쟁이라는 위기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 낸 도구이다. 전쟁 상황에서는 평상시의 법률적 힘이 정지하고 초법적인 질서가 들어선다. 전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초법적 질서를 지탱하는 단순명료한 논리이다. 심지어 이 단순한 질서 속에서는 모든 이의 생명은 존엄하므로 보호받아야 한다는 근대국가의 기초 윤리마저 무시된다. 하지만 실상 이러한 질서는 문명사의 초입부터 있어 온 것이다. 전쟁에서 만큼은 살해가 정당화된다. ‘합법적 살해’가 가능한 상태가 곧 전시이며, 어떤 점에서 살해는 독촉 받는다. 이러한 질서 속에서는 피아가 따로 없다. 모든 전쟁에서 가장 먼저 살해 위험에 노출되는 이들은 약한 자들이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민간인 사상자 수는 항상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다. 싸움에 가담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해서 살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결국 모두의 생명은 위기 상태에 처하는 것이다. 때로 개인의 생명은 목적 달성을 위해 언제든지 희생될 수 있으며, 그 목적에 방해가 되는 생명은 가차 없이 제거된다. 결국 전쟁 상황에서의 폭력은 용인되며, 이 정당한 폭력의 성실한 집행자는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전쟁의 질서 속에서는 폭력이 곧 법인 셈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의 잔혹성을 은폐하고 ‘합법적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 평화유지라는 허울 좋은 명분은 전쟁의 폭력을 정의로운 행위로 포장하는 전형적인 예이다. 휴머니즘의 기치 아래 타국민의 인권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우는 것 또한 그렇다. 악당을 쳐부수는 영웅의 이야기나 각종 무용담 또한 폭력을 미화시키는 장치가 된 지 오래다. 이런 정당화 담론 속에는 정의로운 폭력과 사악한 폭력의 구분이 있다. 그러나 이 구분은 전쟁의 ‘합법적 폭력’을 견고히 떠받치기 위한 책략과도 같다. 전쟁무기는 이 구분에 따라서가 아니라 자본의 논리에 따라 유통된다. 전쟁무기의 성능을 보여주는 ‘무기 쇼’는 이 논리의 정확한 반영이다. 똑같은 무기가 방어에도 쓰이고 살해에도 쓰일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방어하는 무기는 적을 살해하는 무기이기도 하다. 동일한 행위가 다른 이름으로 표현될 뿐이다. 살해를 정당화하는 ‘예외상태’로서의 전쟁에서는 모든 생명이 같은 수위의 위기 상태에 놓인다. 언제라도 살해당할 수 있는 생명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것이 곧 오늘날의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 인간은 무고하게 죽는다. 죄 없이 죽어도 항변할 수 없고, 살해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해괴한 인류 생태계이다. 동물 생태계에서는 이러한 죽음이 자연 상태를 의미하지만 인류 생태계는 그런 죽음을 추방시키는 과정을 밟아오며 이를 문명이라 불렀다. 죄가 있어야만 죽일 수 있고, 죄가 있더라도 함부로 죽일 수 없는 것이 인류 생태계의 질서였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무고한 생명을 ‘합법적으로’ 살해하는 희생제의가 그 예이다. 그런 점에서 전쟁은 희생제의와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 원시공동체사회, 고대사회에 있었던 제의의 최종 단계는 희생양을 처형하는 것이었는데, 그 때의 제물은 종종 인간이었다. 누구나 제물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제물에도 자격이 있다. ‘희생양’이 되려면 무고해야 한다. 순결하지 않은 인간, 죄가 있는 인간은 제물이 될 수 없다. 왜 그런가. 희생제의는 위기에 처한 공동체 구성원들의 불안과 폭력을 달래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모두의 분노를 제물에 집중시켜 폭력을 방출해버림으로써 평온을 되찾게 하는 것이다. 제의에서 벌어지는 처형에는 결국 모두가 공범으로 가담하게 된다. 무고한 희생양이 처형되는 과정을 목도하면서 그들은 죄의식을 느끼고, 행위를 뉘우치며, 자신들의 폭력을 참회하게 된다. 희생제의가 갖는 치유효과는 그렇게 생겨난다. 그런데 만약 희생양이 죄 지은 자라면 처형의 성격이 달라진다. 그것은 희생제의가 아니라 죄과를 묻는 합법적 처형인 것이다. 그 때 제의에 참여하는 자들은 더 이상 공범이 아니라 단순한 참관자여서 죄의식을 느낄 까닭도 없고, 폭력이 정화될 수도 없다. 전쟁도 그렇다. 만약 어떤 전쟁이 악에 대한 응징이라면 폭력은 권장될 수도 있다. 악한 자들을 살해하는 것은 그렇게 허용될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지지받는다. 면책 받은 살해인 셈이다. 그러나 선한 전쟁이란 어디에도 없다. 전시의 면책 살인은 그래서 위장된 폭력이다. 살해당할 가능성은 팔레스타인이나 중동처럼 국지전이 벌어지고 있는 특정 지역만이 아니라 이제 전 지구적인 문제로 확산되었다. 그것이 인류 생태계의 현재 상황이다.

노순택의 작업은 한국을 표본으로 삼아 이 ‘가련한 생명’들의 생태학을 탐사하고 있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인류 생태계의 그것과 같다. 전쟁무기의 실체는 은폐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망각되어 있다. 하여 첨단무기들이 본래 생명을 위협하는 도구임을 환기시켜 주기 위해 작가는 약간의 기교를 부린다. 이 기교는 사실 현실을 받아들이는 시각에 따라 동일한 현상이 전혀 다른 맥락으로 인식될 수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방법이기도 하다. 마치 똑같은 전쟁이 때로는 침공으로, 때로는 방어로 해석될 수 있듯이 말이다. 전투기의 성능을 실험하는 ‘에어쇼’는 구경꾼의 시각에서 보면 찬탄을 자아내게 만드는 장관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실전에 돌입했을 때 이 전투기들은 끔찍한 살인기계가 된다. 전투기가 구경꾼들의 머리를 뚫고 들어가거나, 가슴팍을 파고드는 장면들은 살인기계에 희생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경고로 읽힌다.

하지만 상식적으로는 무기를 장악해야 생명주권을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는 논리이므로 이를 나무랄 수는 없다. 다만 거기에는 타인을 살해해야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는 전쟁논리가 깔려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인류 생태계의 질서를 동물 생태계의 그것과 동일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가장 저열하고도 잔악한 문명사의 치부에 대해 함구하는 것과도 같다. 폭력의 제물이 되기를 원치 않는 개인은 그렇게 폭력의 집행자가 되고, 이러한 이행 과정을 통해 폭력은 끝없이 순환한다. 기관총 쏘는 연습을 하는 어린 소녀나, 아내에게 소총 사격을 가르쳐 주는 남편, 병사의 도움을 받아 가녀린 팔로 수류탄을 투척하는 여성의 모습은 폭력의 제물이 되기를 거부하는 절박한 몸부림의 변형이기도 하다. 자신을 죽이려는 살해자 앞에서 묵묵히 당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는 ‘합법적 살해’의 경우에도 그렇다. 죄 지은 자도 사형집행인 앞에서는 최소한의 저항을 하게 마련이며, 돌팔매질에는 팔을 들어 몸을 보호하는 것이 생체의 자연스런 반응인 것이다. 하물며 무고한 생명이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려 하는 자에게 폭력으로 맞서는 것은 자연스런 순리다. 그래서 이 힘없는 아이와 부녀자들은 무기 사용법을 습득한다. 폭력에 맞서는 또 다른 폭력이 악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폭력이 시작되자마자 끌려들어갈 수밖에 없는 가혹한 딜레마이다. 그래서 무기 사용법을 익히는 이들의 모습은 살해 위험에 팽개쳐진 가련한 생명들이 또 다른 폭력을 통해서만 자신의 생명주권을 지켜낼 수밖에 없는 인류 생태계의 야만적인 상태를 극명히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국가권력은 허수아비가 된다. 국가는 위기상황에서 개인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국가라는 추상을 지켜내기 위해 개인이라는 구체를 희생시키기도 한다. ‘합법적 살해’는 오히려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된다. 개인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개인의 자격으로 이루어지는 살해행위는 범죄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국가는 무엇 때문에 있는가? 개인을 합법적으로 살해하는 국가란 오히려 국민의 적이 아닌가? 허구적인 국가 권력의 울타리에 갇혀 살해 가능성 속에 팽개쳐진 가련한 생명들은 이제 야생의 자연을 떠돌아다니는 힘없는 초식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스스로 무기를 들지 않으면 생명 주권을 보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구책이 결국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그들의 운명은 오히려 가공할 파괴력을 지닌 전쟁무기들이 존재하지 않는 동물 생태계의 상황보다도 더 치명적이다. 세계 각지에서 무고한 생명들이 집단으로 살해당하는 인류 생태계의 현주소가 그 점을 반증한다.

이로써 다음과 같은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첫째, 전쟁무기는 생명주권을 박탈하며, 누구도 거기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전투기들이 마치 인체를 목표물로 삼아 돌진하는 듯한 모습의 사진은 그 점에 대한 상징이다. 둘째, 전쟁에서는 ‘합법적 폭력’이 정당화되며, 더 정확히는 ‘초법적 폭력’만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옹호를 기치로 내걸었던 근대국가와 그 유산으로 남아있는 오늘날의 국가권력은 이 지점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그 가치를 폐기시킨다. 따라서 개인은 국가권력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를 지켜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바람이자 환상에 불과하다. 그래서 가련한 생명들이다. 무기사용법을 습득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염치없는 국가권력의 초라한 한계가 드러난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전쟁무기의 가공할 화력에 찬탄을 보낸다. 무기가 ‘우리 편’의 수중에 있을 때의 안도감과도 같은 것이다. 뒤집어 생각하여 ‘적’의 무기가 강력할수록 찬탄이 공포로 바뀐다는 것을 생각하면 되겠다. 모든 무기는 ‘생각 없는’ 도구인지라 누구라도 살해할 수 있다. 이 자명한 진실을 은폐하고 호도하는 것이 ‘에어쇼’와 같은 시장논리의 마케팅 전략이다.

그렇게 해서 문제는 이제 법으로 옮겨간다. 국가와 개인의 관계는 법의 기초 위에 세워져 있다. 개인의 행위는 법이 허용하는 테두리 내에서만 가능하고 국가도 그렇다. 생명주권, 인간의 존엄성 등 인권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는 법의 제재를 받는다. 하지만 <좋은, 살인>이 줄기차게 문제 삼고 있듯이 현재의 인류 생태계는 법의 힘이 미치지 않는 영역으로 멀어져가고 있다. 인권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생명주권은 전쟁무기가 상품이 되어버린 오늘날 공허한 말로 전락해버렸다. 전쟁무기는 사용가치가 있기 때문에 생산되고, 상품가치가 있어서 판매된다. 인류 생태계의 치명적인 모순과 위선이 여기에 있다. 법은 인권의 기초 위에서 탄생했다. 그런데 이 법이 전쟁무기의 생산을 용인한다. 이 무기들은 법이 보호하고자 하는 인권의 근간을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무너뜨린다. 그렇다면 법은 무엇 때문에 있는가. 전시에 등장하는 ‘초법적 폭력’을 법이 다스릴 수 없다면 우리는 법을 폐기하고 이 ‘초법적 권력’을 따라야 하는가. 그러나 후자가 ‘선한 법’이 아님은 너무도 자명하다. 따라서 ‘초법적 권력’을 용인하는 법의 위선을 발가벗길 필요가 있다.

이 위선이 법 자체에 내재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위선은 법의 집행에서 나온다. 법은 야생의 상태에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아노미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열어주었다. 아노미 상태에 폭력성이 내재해 있다면 노모스로서의 법은 그것을 축출하고자 한다. 법이 폭력이 되는 것은 단지 법을 무시하는 초법적 권력이 작동하는 한에서이다. 모든 종류의 ‘예외상태’에서 이 초법적 권력은 법 위에 군림하여 통치의 질서를 재구성한다. 이 초법적 권력 또한 법에 의지하여 나왔으므로 법을 적용하는 척 하지만 그것이 법이 아님은 자명하다. 법의 효력을 갖되 법이 아닌 이 수상한 초법적 권력이 위선의 가면 속에 감추어진 본래 모습이다. 초법적 권력의 또 다른 이름이 바로 행정 권력으로, 전시에 발동하는 초법적 폭력의 주체이기도 하다.

초법적 권력의 작동원리를 이해하면 우리는 어째서 ‘법의 위선’과도 같은 전쟁무기의 상품화가 가능한가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우려스러운 점은 생명주권을 박탈하면서까지 법을 무시하는 이 초법적 권력, 노모스 이전의 폭력보다도 훨씬 교활하고 잔혹한 이 권력이 인류 생태계의 질서를 교란시킬 정도로 커졌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권력은 법질서의 내부에서는 권력의 힘을 행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의 효력을 일시적으로 정지시킬 수 있는 ‘예외상태’를 만들어내야 한다. 전쟁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상태를 항구적으로 유지해야만 초법적 권력의 수명이 연장된다. 따라서 무기 생산과 판매는 초법적 권력이 수명을 연장하기 위한 책략이기도 하다. 생명주권을 볼모로 삼아 자행하는 이러한 책략은 원칙적으로는 위법이다. 법의 대원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인류 생태계의 역사에서 법은 폭력과 한번도 결연하게 단절해본 적이 없었다. 법은 폭력과 내밀하게 연계되어 작동하면서 초법적 권력을 용인해 왔다. 위법을 허용하는 법, 그것이 법의 또 다른 얼굴인 셈이다. 이 내밀한 관계를 끈질기게 밝혀내고 문제 삼지 않는다면 노모스 이전의 야생 상태로 전락한 인류 생태계의 질서를 다시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생명주권을 위협하는 전쟁무기의 실체에 의문을 던지는 노순택의 작업은 그러한 시도를 향한 작은 발걸음이이다.

에어쇼를 보면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뻗은 사람들의 모습은 살인기계를 환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구경꾼의 뒷모습을 희미한 그림자처럼 촬영한 사진에는 유령과도 같은 음습한 분위기가 서려있다. 이 두 장의 사진은 살해할 수 있는 가능성과 살해당할 수 있는 가능성의 차이를 보여주는 추상적 이미지이다. 개인들에게 이 차이는 아주 크지만 실상 양자 사이에는 인류 생태계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아주 작은 차이만이 있다. 관계는 언제든지 역전될 수 있는 것이다. 무기를 든 자가 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은 높은 반면, 상대가 무기를 들었을 때 그는 즉각 살해당할 수 있는 자가 된다. 따라서 살해할 수 있는 자는 곧 살해당할 수 있는 자이기도 하며, 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살해당할 수 있는 가능성도 함께 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힘써야 하는가? 오히려 인류 생태계는 이 모든 가능성들을 최소화하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한다. 살해할 수 없을 때 살해당하지 않을 수 있다. 살해할 수 있는 생명들이 득실거린다는 것은 살해당할 수 있는 생명들도 그만큼 무수히 많다는 뜻이다. 그렇게 <좋은, 살인>은 살해할 수 있는 생명들에게 던지는 경고의 메시지이자, 살해당할 수 있는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길을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Posted by paixa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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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올해로 60년이 되었다. 반세기하고도 십년이 더 흐른 시간이다. 전쟁과 더불어 태어난 세대가 이제 서서히 인생의 황혼기를 향해갈 만큼의 긴 세월이 지난 것이다. 전쟁의 상처가 아물고 후유증이 사라질 만큼 오랜 시간이 흘렀다고 볼 수도 있다. 한 세대 이상을 온전히 통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이 남긴 어두운 그림자는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 남북 간의 군사적 대치상황은 여전히 첨예하고, 정치적 갈등과 긴장은 수차례 있었던 화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해소될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경제적 협력관계 또한 최근에 와서 급속히 냉각상태로 접어들고 있다. 미시적인 부분으로 눈을 돌리면 문제는 더 복잡하다. 가족을 지척에 두고도 보지 못하는 이산가족의 비애는 우리에게 과연 인류애라는 가장 보편적인 가치가 남아있는가를 의심하게 만든다. 한편 전쟁 이후 남북한 사회를 막론하고 우리 모두는 사상의 자유를 박탈당하여 강요된 가치만을 붙들고 살아왔다.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없는 사회에서는 인간도 성장하지 못한다. 우리는 성장이 가로막힌 인간으로 반세기 이상을 지내온 셈이다.

한국전쟁은 분단의 직접적인 산물이며, 분단은 냉전 이데올로기의 갈등이 빚어낸 20세기의 파생물이다. 그런데 이 파생물을 만들어 낸 냉전구도는 와해되었고, 이를 대체한 새로운 국제질서가 한반도의 주변 정세를 감싸고 있다. 그렇다면 분단의 현 상태에도 변화가 생겨났다고 보아야 한다. 분단 상황에 문제를 제기하고 해석하는 문화생산자들이 이 변화를 직시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응책을 구할 시점이 되었다. 물론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분단의 현재를 기록해나가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정작 분단의 현실에 대한 우리 시대의 인식은 매우 안이한 상태로 미끄러져가고 있는 것 같다. 분단 현실이 우리 사회의 가장 근원적인 갈등 구조라는 생각은 차츰 공감대를 잃어가고 있으며 마치 본래부터 주어져 있던 현실인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사진가들의 태도에서도 이와 같은 느슨한 인식을 감지할 수 있다.

근래 와서 분단에 대한 진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작업을 해나가는 작가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저널리즘의 차원에서 생산된 단편적인 이미지들은 많다. 하지만 그것은 산발적인 정보에 가깝다. 어떤 점에서 ‘중립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정보적 차원의 이미지들은 분단 현실에 대해 아무런 발언을 하지 못한다. 나아가 그러한 이미지들은 사용자의 관점, 유통의 맥락에 따라 큰 폭으로 왜곡될 개연성이 있다. 사진의 유통과정에서 발생하는 이런 왜곡은 상식적인 문제이지만 정작 사진가들은 그 점을 종종 망각해버린다. 따라서 분단 문제와 같은 사안에 대해서는 사진가 스스로 입장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80년대부터 줄곧 분단 문제에 천착해 왔던 강용석의 최근 사진전 <한국전쟁 기념비>는 반공이데올로기의 퇴색을 주제로 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마치 전쟁기념비에 대한 찬미의 언어로 받아들였던 후일담도 있다. 비교적 분단에 대한 작가적 관점이 명확함에도 이런 오해가 발생하는 경우를 고려한다면 ‘중립적’인 사진에 대한 믿음은 너무도 순진한 태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중립적인 정보 생산의 차원에서 분단 문제에 접근하는 사진은 더 이상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한국전쟁 기념비>의 경우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매향리> 작업이 그랬듯이 강용석이 이 작업을 통해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관객들 스스로 전쟁기념비의 의미를 반추해볼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었다. 메시지가 분명하고 직접적일 경우 사진은 강압적인 설득의 언어가 되기 쉽다. 이를 피해갈 수 있는 길을 열어두었던 것은 한편으로 전쟁기념비의 위압적인 풍모와 그 배후에 깔려있는 일방적인 설득 및 강요의 논리를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데 있었다. 따라서 그의 방법론이 빠질 수 있었던 위험은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강용석 이후 분단 문제를 우리 시대의 첨예한 화두로 삼아 의미심장한 작업을 해나가는 경우를 노순택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분단의 향기>에서부터 <Red House>, <비상국가>에 이르기까지 노순택은 분단이야말로 한국 현대사의 모든 갈등과 비극의 기원이자 현재진행형으로 남아있는 긴급한 사태임을 드러내는 데 힘써왔다. 분단이 하나의 ‘상태’로 남아있는 이상 우리 사회는 항상 ‘비상국가’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하여 그 상태가 삶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해 들어오는 양상들을 집요하게 추적해 왔다고 할 수 있겠다. 냉전 구도의 와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첨예하게 남아있는 이념대립, 분단논리에 기대어 행정 권력을 남용하고 개인을 억압하는 야만적인 정부, 준(準)전시 상황을 지속시키는 전쟁무기의 판매전략 등을 정교하게 드러내 보임으로써 분단의 부정적 파급력이 확장되어가는 우리 시대의 현 실태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이 잠시 멈추었다고 해서 평화가 찾아온 것이 아니라 분단은 여전히 긴급한 사태로 남아있고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만 가고 있음을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다. 노순택의 작업이 던져주는 메시지가 그것이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그가 수행해 온 작업의 가치를 분단을 체험했던 독일에서 먼저 알아보았다는 점이다. 뒤셀도르프에서 열렸던 <비상국가>전은 독일 내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나 정작 국내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이는 분단의 긴급함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외국보다 나태하다는 점을 반증한다.

한국전쟁 발발 60년을 기념하여 관주도로 각종 행사를 준비하는 것도 분단 현실에 대한 진지한 각성에서 나왔다기보다는 전시행정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국방부가 주관하여 한국전쟁의 흔적을 찾아나가는 사진작업을 기획한 것이 그렇다. 이런 기획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지속적으로 수행해 왔어야 맞다. 매우 오랜 시일이 걸리는 작업이며 일회성 행사로 끝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간 군사기밀이라는 명분으로 공개하지 않았던 DMZ를 비롯한 각종 군사 지역이 이번 기획을 계기로 카메라 앞에 노출될 전망이다. 이 또한 정보 독점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수년 전 민통선 지역을 촬영한 사진 때문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까지 되었던 이시우의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서정적인 시각으로 군사 지역의 분단풍경을 담아낸 그의 사진이 국가보안법 위반이었다면 우리 사회에서는 분단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두는 것 자체를 범죄시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어쨌든 저간의 사정은 접어두고 국방부 주도로 분단풍경을 공개한다니 이제는 더 이상 이처럼 터무니없는 사태가 발생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기대를 걸어본다.

하지만 이런 기대에도 불구하고 사진가들의 분단에 대한 인식의 태도에는 아쉬운 점이 있다. 본래 관의 주도하에 시행하는 사진 기록은 한계를 갖고 있다. 사진은 개인이 찍더라도 사진을 선별, 분류하여 활용하는 기록물 생산의 주체는 따로 있기 때문이다. 사진 기록의 역사에서 생산 주체의 관점이 배제되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따라서 이와 별도로 사진가 개인의 주체적 관점을 지켜낼 수 있는 작업을 분리하여 수행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정작 이런 방식의 작업은 매우 산발적인 형태로, 게다가 지속성을 갖지 못하고 우발적인 계기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다반사이다. 이는 적극적으로 분단 상황에 주목하는 작가들이 드물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시대의 현실 인식이 그만큼 안이해져 있기 때문이다. 투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소외와 빈곤, 타인의 고통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사명감에서 카메라를 잡은 이들은 우리 사회의 근원적인 문제에 천착하기보다는 뉴스거리를 찾아 해외로 눈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 물론 각종 분쟁지역에서 발생하는 폭력이나 기아와 빈곤 때문에 최소한의 인권마저도 보장받지 못하는 이들의 고통에 관심을 쏟는 것을 탓할 바는 아니다. 다만 그런 작업에 어떤 문제의식이 동기로 작용하는지는 중요하다. 제국주의의 야만적 폭력이 저질러놓은 죄악을 은폐하기 위해 서양 사람들이 뒤늦게 제안한 휴머니즘에 우리도 덩달아 감염된 것은 아닌지, 진귀함을 찾는 대중의 요구에 화답하기 위해 극적인 현장으로 달려가는 ‘사건 사냥꾼’처럼 새로운 얘깃거리를 찾아나서는 저널리즘의 관성은 아닌지 반문해 볼 시점이 되었다. 요컨대 진정한 문제의식과 반성 없이 현상만을 렌즈 뒤편으로 옮겨내는 행위는 공허하기 짝이 없다.

물론 구체적인 사안에 집중하여 분단문제를 다루는 작가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손승현은 비전향 장기수들의 초상작업을 통해 이념 전쟁에 희생된 개인의 비애를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접근하여 보여주었다. 한편 최원준의 경우처럼 파주 근교의 군사시설물을 촬영하여 우리 사회에 산재해 있는 기이한 공간의 일부로 편입시켜내는 관점도 있다. <The Game>에서 분단의 다양한 상징들을 찾아 보여준 박진영의 작업도 있다. 이처럼 근래에도 분단 문제에 천착한 작업들은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단편적인 작업들이 우리 시대의 분단 현실을 온전히 보여주는 데는 많은 한계를 갖고 있다. 여기에는 우선 분단 상황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분단이 야기한 변화들이 일상으로 깊숙이 스며들어 버린 탓이 크다. 분단 상황은 어느 덧 익숙한 현실이 되어있다. 불과 수십 킬로미터 거리밖에 되지 않는 조국산천을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낯설거나 기이하지 않은 현실, 백두산처럼 이름 높은 우리의 명산을 가려면 타국을 통해야만 하는 현실, 가장 위험하고 경계해야 할 주적을 동포로 상정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분단문제에 접근하는 시각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분단의 경험적 현실태를 단순히 기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물론 최소한의 기록 작업조차 부족한 현 단계에서는 다각적인 측면에서의 사진 기록이 요구된다. 그래서 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그간 분단 문제를 다룬 작가들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사회문제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작업을 해 온 작가들만이 분단 문제에 관심을 두어 왔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분단의 현실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 모두는 분단의 부정적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고 있다. 따라서 분단을 주제로 작업을 하는 작가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전쟁과 분단을 해석하는 다양한 관점들이 모이고 부딪치는 과정에서 분단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역동적인 힘이 생겨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국방부가 기획한 사진전은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다. 관이 주도하는 행사인 탓에 편향적인 시각이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 또한 이 전시에는 그 동안 분단을 주제로 작업을 해 오지 않은 작가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꾸준히 분단을 주제로 작업을 해 온 작가들의 눈에는 의아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전시를 계기로 삼아 분단 문제가 일부 작가들만이 관심을 두어야 할 특수한 사안이 아니라 모두가 얽혀 있는 보편적 사안임을 확인할 수 있다면 매우 뜻 깊은 일이 될 것이다. 혹 우리 모두가 분단국가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지는 않은가?

(월간사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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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살인

전시 2010/02/27 22:52
 

상상마당에서 진행하는 작가지원 프로그램 스코프의 올해 대상작가인 노순택, 이혁준의 전시 오픈이 있었다. 노순택씨의 전시를 보다가 주명덕 선생이 뼈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노순택씨의 작업 <좋은, 살인>은 전쟁무기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이자, 그의 표현대로라면 “전쟁이 무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무기가 전쟁을 필요로 하는” 우리 시대의 기만성을 폭로하는 것인데, 어째서 이런 전시가 케이티엔지와 같은 기업의 돈을 받아 이런 ‘훌륭한’ 전시장에 걸리느냐는 것이다. 오히려 기업의 후원을 받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길거리에 사진을 거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 이런 의미라고 보면 되겠다. 윤리가 문제라면 문제일 수 있겠지만, 너무 청교도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든다.


원론적으로는 맞는 얘기인데, 좀 꼼꼼하게 따져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우선 후원의 문제. 담배 만드는 회사, 그러니까 어쩌면 군수업체와 본질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는 회사에서 반(反)자본주의적 메시지를 날리는 작가를 지원한다, 이게 무슨 뜻인가라고 보면 될 것 같은데, 좀 곤혹스러운 부분이 있기는 하다. 단순히 받아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런 문제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런 문제다. 어쨌든 받아먹는 것이 낫다. 그래서 후원 문제는 답이 아주 쉽게 나온다. 물론 받아먹지 않고 혼자 할 수도 있지만 거기에는 개인의 희생이 따른다. 받아먹는다고 해서 작업의 주제나 메시지의 수위가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일부러 안받을 필요는 없다. 물론 오늘날 자본주의형 기업들의 교활함을 보면 소름이 오싹 돋을 때가 많다. 자기업의 부정성을 은폐하기 위해 인권, 환경운동 단체에 지원금을 대준다거나 기업 홍보에 열을 올리는 그런 모습에는 눈이 찌푸려질 때가 많지만, 그것이 우리의 ‘조건’이다. 굶는 사람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부도덕한 부자에게 돈을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런 문제와도 사실은 좀 비슷하다. 나는 나쁜 놈한테 비록 굽실거리더라도 받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건 각자 판단하기 나름이라 정답은 없다.


다음은 그런 사회적 메시지가 있는 작업을 ‘고상한’ 전시장에서 전시하는 것이 온당한가의 문제. 오늘 낮에 살가두의 사진전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해보았지만, 역시 쉬운 문제는 아니다. 아프리카 난민들, 기아에 허덕이는 그들을 ‘아름답게’ 찍어놓은 살가두는 내 취향은 아니고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 아주 엄격하게 말하자면 그런 사진은 살가두처럼 찍어서도 안 되고, ‘고상한’ 전시장에 걸려서도 안 된다. 그런데 살가두는 그렇게 해서 엄청난 후원금을 모으는데 일조하고 있다. 길거리에 사람이 많이 지나다닌다고 해서 많은 사람이 보는 것은 아니다. 보아봤자 효과도 별로 없다. 공간의 중요성이 있는 셈인데, 그건 말의 중립적인 의미에서 쇼, 그러니까 방법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이다. 전시장이라는 공간에 많은 사람이 오지는 않지만 그들은 찾아서 오는 자들이며 관심이 있어서 오는 사람들이다. 스쳐지나가는 행인 100명보다는 찾아오는 1명이 더 중요하다. 전시장은 그냥 ‘고상한’ 공간이 아니라 ‘문제의식’을 천명하는 공간이자 그것을 담론화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 작은 공간에서부터 말문이 터져 사회 전체로 파급되는 셈이다. 그래서 전시장은 아주 특수한 공간이다. <좋은, 살인>이 삼성 리움 같은 곳에서 열리면 안 되는가. 만약 리움이 진정 훌륭한 미술관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럴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고 본다. 작가의 문제가 아니라 작품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전시장에 ‘고상한’ 예술작품만 들어가야 한다는 원칙은 어디에도 없다. 그 곳은 오히려 가장 첨예한 문제의식을 던져주는 ‘언어’가 들어가는 곳이다. 상품진열대처럼 변질되어 버린 그 공간을 소독한다는 의미에서도 그런 작품들이 들어가는 것이 맞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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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OPF 2009

사진 2009/12/15 23:28
 

상상마당의 작가지원 프로그램인 SKOPF의 제 2기 지원 작가가 최종 결정되었다. 1차에서 권순관, 노순택, 이선민, 이은종, 이혁준, 이 다섯 명의 작가가 선정되었고, 2차에서 다시 노순택, 이혁준이 최종 선정되었다. 다섯 명의 작가 중 2명을 다시 선정했는데, 사실 누가 되었더라도 할 말이 없다. 모두가 선정될 만한 자격과 역량을 가졌기 때문이다. 지난 토요일에 열렸던 리뷰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듯이 다섯 명의 작가가 그 동안 준비해 온 포트폴리오는 완성도가 높다. 2차에 선정되지 않은 나머지 작가들은 앞으로도 잘해 나갈 사람들이다. 매번 드는 생각이지만 경쟁 시스템이라는 것이 진정 작가들에게 필요한 것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 지원 제도의 공정성을 위해 도입한 방법이긴 하지만 경쟁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위계를 세워버린다. 작가의 인지도, 작가에게 호감을 갖는 대중의 양, 이런 것들이 현실적으로 중요한 상태에서 경쟁에서 밀려난 작가들의 위상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1차에서는 추천 방식을 택한 후, 다시 2차에서 경쟁 시스템을 도입한 이 지원프로그램은 다른 지원제도에 비하면 공정성이 높다고 할 수 있겠으나 이상적인 모델은 아니다. 제도는 어쩔 수 없이 한계를 갖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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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동

사진 2009/11/16 21:43
 

자료를 찾다가 문득 이상일 선생의 망월동 사진집이 손에 들어와 다시 보니 참 완성도가 높은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이상일이라는 사진가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싶을 만큼 모든 면에서 훌륭한 것 같다. 개인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참으로 오래, 공들여, 참회하는 심정으로 열과 성을 다한 작업이다. 이 작업의 구성을 보면 다큐멘터리 사진의 모범적인 형태로 인식되어 왔던 서사구조가 매우 탄탄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워커 에반스나 로버트 프랭크의 방법, 그러니까 작품집의 형태로 사진을 보여주고자 할 때 사진의 순서에 따라 서사구조를 만들어나가는 그런 방법을 매우 적절하게 구사하고 있다. 그렇게 이 작업은 한편의 서사시가 된다.


근래의 작가 중 노순택 씨의 망월동 작업, 이것도 매우 뛰어나다. <망각기계>가 그것인데, 차이는 있다. 노순택 씨의 망월동은 서사구조보다 개념에 치중해 있다. 이 두 작업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지만 망월동을 다룬 우리 시대의 뛰어난 두 가지 다른 작업이므로 자연스럽게 비교가 된다. 이상일의 망월동, 여기에는 뭐랄까, 아직도 휴머니즘적인 그런 요소가 물씬 풍겨 나온다. 전반부를 구성하고 있는 사진에는 엄숙함과 비장함, 죽음에 대한 존중, 산 자의 비애, 이런 것들이 짙게 깔려있고, 후반부는 코믹화되어가는 역사, 이런 것이 있다. 중간부분에 등장하는 초상은 이 두 부분의 연결고리 정도이다. 카메라 워크, 이것은 매우 뛰어나다. 조명도 잘 쓰고 공간도 잘 본다. 한편 노순택의 망월동, 여기에는 사람냄새가 거의 풍겨 나오지 않는다. 아주 차갑게, 기계적으로 일그러진 초상과 뭉개진 형태를 통해 잔혹성을 형상 자체에 발라놓는다. 그 외에 다른 카메라 워크나 테크닉은 거의 쓰지 않는다. 이상일의 경우처럼 망월동에 깊숙이 개입하지 않고 멀찌감치 물러나서 거리를 두고 폭력성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하는 셈이다. 망월동에 관한 한 이 두 작업만한 다른 작업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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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사진

사진 2009/11/03 21:20

부산의 고은사진미술관에서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상황”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했다. 발제문은 분량이 너무 길어 올리지 않고 간략하게 요점만 정리해 본다. 첫째, 다큐멘터리 사진은 장르가 아니라 스타일 혹은 형식이다. 둘째 다큐멘터리는 1930년대에 등장한 역사적 개념이자 모순적인 개념, 하여 다큐멘터리 사진이라는 표현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부적절한 용어이다. 하지만 이미 이 표현 자체가 일반화되어 있으므로 사용은 하되 개념 정의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셋째, 다큐멘터리 사진은 사진 기록물, 즉 자료사진과 다르며 저널리즘 사진과도 다르다.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은 사진의 역사 속에서 늘 아방가르드의 위치에 서있었으며 사진의 문법과 형식, 이런 측면에서 시각적 혁신을 주도해 왔다. 1930년대의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은 계몽주의의 후예이며 사진이 사회비판과 개혁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자들이다. 저널리즘 사진에서는 아주 엄밀하게 말하여 사진가의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또한 거기에는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가 중요하지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는 상대적으로 중요치 않다. 저널의 독자들은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주도해 왔던 ‘시각적 혁신’이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며, 관심도 없다. 이미 보편화되어 있는 사진이미지의 문법과 형식이 저널리즘에서는 계속해서 재생산되지만 다큐멘터리 사진은 그것을 넘어서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다큐멘터리는 끊임없이 시대에 맞는 적합한 형식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편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흐름을 아주 거칠게 정리하자면,
우선 1950년대의 '생활주의 리얼리즘'은  ‘기록’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적 의미에서의 다큐멘터리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우선 리얼리즘 사진가들은 공모전을 통해 자신의 사진을 ‘작품’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공모전은 입상작을 가려내기 위한 기준이 필요하고, 따라서 ‘작품’으로 인정된 ‘기록’사진은 그 평가의 기준에 따라 정형성을 띨 수밖에 없었다. 조금 과장하여 말하자면 1950-60년대의 리얼리즘 사진은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정형성을 갖고 있으며, 내용의 측면에서는 전후 한국사회의 궁핍한 생활상을 담아낸다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리얼리즘 사진이 가졌던 이러한 한계는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를 거치면서 극복된다. 이를 실행해 나간 이들은 강운구, 주명덕의 경우처럼 본격적인 의미에서 다큐멘터리적인 방법론을 끌어들인 사진가들이다. 이후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다큐멘터리 사진은 내용이나 형식의 측면 모두에서 좀 더 다양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에서는 70년대 문제의식의 연장선에서 근대화의 부정성에 천착하여 전통의 가치를 찾아나가는 경우(이갑철)도 있고, 한국현대사의 첨예한 갈등구조인 분단의 문제에 몰두하는 경우(강용석)도 있으며, 개인사를 보편적 현실로 환원시켜 내는 경우(최광호, 이상일)도 있었다. 방법의 측면에서도 이들은 저널리즘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장기적인 기획 하에 개인적으로 작업을 해나갔다. 한편 이들의 사진이 저널리즘 사진과 갖는 차별성은 몇 가지의 관점에서 정리될 수 있다. 우선 이들은 양질의 인화를 중요시 여겼으며, 그것은 곧 사진이 ‘예술작품’으로서의 위상을 지닐 수 있는 자격을 의미했다. 이는 서양식 모더니즘의 유산이지만, 사진이 미술관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소장’ 가치를 판단하는 매우 중요한 척도이기도 하다. 그것 없이 사진은 정보가치만으로 지위가 결정되는 복제 이미지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신문, 잡지에 실릴 수 있을 정도의 ‘적당한’ 품질만 된다면 큰 문제가 없는 저널리즘 사진과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의 작업에 서사구조를 포함시켜 각각의 사진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큰 주제 하에 모여들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고루한 예술전통은 이들의 사진 작업이 갖는 가치를 온당하게 인식할 수 없었다. 우선 미술관을 비롯한 각종 예술제도는 오랫동안 사진을 복제 이미지 정도로만 생각해 왔고, 양질의 인화를 감별해 낼 수 있는 안목조차 없었다. 서양의 미술관들이 사진을 ‘예술작품’으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중요한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던 데 비해, 우리의 경우는 판단 능력조차도 없었던 셈이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사진의 가치를 판단할 때 정보가치에만 의존하는 태도, 즉 무엇이 찍혀있는가를 가지고 사진의 가치를 결정하는 태도는 여전히 남아있다. 이는 곧 한국의 예술제도 전체가 사진을 ‘읽어내는’ 독해의 수준이 매우 낮음을 반증한다. 1970년대의 주명덕, 강운구가 확립시켜 놓은 절제된 문법, 이갑철의 역동적 프레임, 강용석의 중성 톤, 그밖에 다양한 형태의 카메라 워크를 통한 수사 및 공간의 기술(記述)들이 갖는 중요성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문제를 제도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후속 세대에 속하는 사진가들 또한 다큐멘터리의 가치를 관념적으로만 받아들일 뿐 그것을 실행해 옮기는 경우는 많지 않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 다큐멘터리’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사진가들의 상당수는 저널리즘적인 소통에 집착하여 조급하게 수사에만 매달린다. 그들은 인쇄매체의 쇠퇴가 곧 다큐멘터리의 위축을 가져왔다는 안이한 인식에 사로잡혀있기도 하다.  한국 현대사진의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노순택의 작업은 주목할 만하다. 2000년대 이후 꾸준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는 분단 상황과 관련한 한국현대사의 근원적인 갈등구조 및 다양한 사회적 폭력의 문제를 들추어내고 있다. 현실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이 그의 작업을 이끌어가는 추동력임은 말할 나위 없으며, 이는 ‘사회적 다큐멘터리’의 역사적, 개념적 정의에 비추어 보아도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점은 소통의 방법론에 대한 모색이다. 그의 작업에서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고전적인 문법구조와 형식이 확장되어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 시대의 현실은 다큐멘터리 사진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요구에 화답하고자 하는 시도는 그리 많지 않으며, 때로는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경우도 많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 못지않게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하는 방법적 고민이 함께 필요한 시점이다. 그것이 곧 다큐멘터리 사진의 핵심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것 없이 현실은 깊은 침묵 속에 빠져들 것이며, 다큐멘터리 사진은 그 침묵의 폭력으로부터 현실을 지켜내야 할 의무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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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복음

독서 2009/10/13 02:09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가 기획하여 10여명의 개신교 신학연구자들의 논문을 모은 <무례한 복음>을 훑어보았다. 한국사회 개신교의 문제점에 대해 내부에서 이러한 성찰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선 반갑다. 장윤재 교수의 흥미로운 지적부터 언급하자면 한국에서 개신교는 ‘비호감’ 종교 1위란다. 이유는 10가지 정도. 인용하면 “첫째는 교회의 세습이요, 둘째는 교회의 물신화이며, 셋째는 땅에 떨어진 도덕성(한국 내 가짜 미국박사의 45%가 신학박사임), 넷째는 타자는 인정하지 않는 근본주의적 신앙관(‘소통의 위기’), 다섯째는 기독교인들의 신행 불일치, 여섯째는 교회 내의 성차별주의, 일곱째는 교회의 기득권 정치세력화, 여덟째는 기독교 이단/사이비 종파, 아홉째는 기독교의 주류 종교화(수적으로 ‘여당’이 된 한국의 기독교), 그리고 마지막 열 번째는 잘못된 선교”.

이 논문집은 마지막 문제, 즉 잘못된 선교에 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특히 공격적인 해외 선교에 초점을 맞추었다. 필자들의 논문 중 대충 눈에 들어오는 사실관계만 열거해도 흥미롭다. 작년 기준으로 한국의 선교는 173개국에 16,616명의 선교사를 파견했으며, 실제로는 이보다 4-5천 명 정도를 덧붙여야 할 것이란다. 한국 선교사가 없으면 21세기의 세계선교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얘기도 심심찮게 나오는 모양이다. 이진구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실장은 ‘선교강국’을 넘어 ‘선교 제국주의’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해외선교가 급속한 성장을 한 데는 까닭이 있다. 필자에 따르면 1960년대 이후 급속한 신장세를 보이던 개신교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저성장을 거듭하다가 급기야는 ‘시장의 포화상태’를 맞는다. 기성 교인을 빼앗아 가는 교인 쟁탈전까지 생겨났던 것이다. 비신자, 타종교 신자가 더 이상 유입될 수 없는 상황에서 국내 선교는 한계에 도달한 셈이다. 하여 해외 선교는 선택이 아닌 필연이 된다.

또 하나 흥미로운 관점은 해외 선교가 1990년대 이후의 현상이라는 측면에서 한국 사회 특유의 근대적 체험과 연결시켜 설명하는 대목. 김진호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의 견해를 인용하면, 1970년대의 한국 기독교는 ‘기도원’ 열풍에 휩싸여 있었다. 이는 개발독재라 불리는 산업화 과정에서 도시로 몰려든 이농인파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이 시기에는 기도원의 신앙체험을 통해야만 교회지도자가 될 수 있었고 교세도 확장시킬 수 있었다. 이제 1990년대에 이르면 도시로 몰려든 잠재적 신자들을 거느리면서 교세를 확장한 교회들이 강남으로 이주하며, 그 교회들을 중심으로 개신교는 새롭게 발전한다. 어떻게 성장하는가 하면, “쇼비즈니스적인 경영전략이 교회의 새로운 동력을 낳는 전략으로 선호”되며, “잘 기획된 더 도시적인 문화공간을 연출한 교회가 더 성공적인 결실을 누렸”고, “도시적 근대성 문화에 ‘적극적인 삶’을 강조하는 신앙적 품성이 유포되었”다는 것. 문제는 “이런 맥락과 관련해서 해외선교라는 신앙적 실천이 이른바 강남권 교회들에 의해 선도되어 범교회적 현상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선교라는 공간 확대의 신앙적 욕망은 돌진적 근대화 과정에서는 거의 생각하지 못했던 요소인 ‘국경 너머’를 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공격적 선도, 무례한 복음, 이런 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수년 전 받은 세례(어쩔 수 없는 개인사정 때문에 받았지만), 무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노순택씨의 <면죄부> 작업처럼 한국사회의 기독교 문화에 대한 진지한 비판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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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인의 아해

사진 2009/08/06 21:11
 

언젠가 아내에게 이제 어린이날을 없앨 때도 됐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무슨 가당찮은 소리냐, 당신이 귀찮고 피곤하니 그런 것 아니냐, 어찌 아이들한테 그리 관심이 없느냐는 핀잔만 돌아왔다. 허나 일년 내내 어린이날처럼 지내는 아이들에게 하루를 전폭적으로 할애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리. 오히려 고아나 불우 아동들을 위한 날을 따로 만드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나.


노순택 씨의 <13인의 아해>를 보고 퍼뜩 드는 몇 가지 생각. 처음 볼 땐 무엇인지 잘 몰랐다가 블로그에 질문을 남겼더니 친절한 대답이 돌아왔다. 답변을 듣고 사진을 다시 보니 과연 그럴 수 있겠다 싶다.


아이들은 예쁘고, 귀엽다. 그야 말로 천사 같다. 길을 지나다가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진다. 머리 쓰다듬어주고 싶고, 볼에 쪽, 하고 뽀뽀해주고 싶어지는 아이들, 기분이 울적하다가도 그 모습을 보면 어느새 상쾌해진다. 나의 두 아이들도 그렇다. 키울 땐 물론 힘들다. 대부분이 그렇듯 아내가 고생했다. 허나 양육은 힘들어도 아이들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 그 힘듦을 보상해 주고도 남는다. 양육 과정에서 아이들의 많은 것을 본다. 그런데 나쁜 것은 잊고 좋은 것만 기억한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선 아이의 부정성과 싸워 정화시켜주어야 한다. 자아가 형성되면서 아이는 고집을 피우고, 이기심을 확장시켜 나가고, 욕심을 부리고, 그러면서 폭력성이 마음속에 똬리를 튼다. 자기보다 약한 아이를 깔보고, 남의 것을 뺏으려 하고, 잘 안되면 울어버리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업신여기고, 어른이 하는 나쁜 짓은 다 한다. 어른이나 아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올바르게 교육시키느냐, 이것인데, 올바로 키워내려 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는 점에서 난감할 따름이다.

우리 시대 아이들의 영악함(사악함, 이렇게 부르고 싶을 때도 있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인간의 심성이 본래 그러하여서인가. 어쨌든 우리 사회에서 아이들의 이 영악함은 길러진 측면이 많다. 부모들의 과도한 애정이 한몫 단단히 하는 듯. 아이에 대한 부모의 애정을 탓할 까닭은 없지만, 과도한 애정은 배타적으로 흐르기 쉽고, 그것은 다시 내 아이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다. 내 아이만 잘 되면 된다는 생각, 타인의 아이는 안중에도 없다. 그러한 마음은 보편명사로서의 ‘아이’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고유명사로서의 ‘내 아이’에 대한 집착이다. 집착에 가까운 사랑이 광기와 무어 다를 바 있겠나. 하여 우리 시대 부모들의 아이 사랑은 광기라 불러도 무방하다. 사랑받고 있음을 알 때 생겨나는 방자함이 아이들의 태도를 결정한다. 그래서 아이에 대한 무관심이 때로는 필요하다.



우리 아이들도 그랬고, 나 역시 그랬을 테지만, 아이의 식탐은 볼이 터져버릴 만큼 먹어대게 만들며, 그것도 모자라 가짜 젖을 끊임없이 빨아댄다.(사진1) 무엇이 신경을 쓰이게 했는지, 왕자처럼 유모차에 앉아있던 아이는 “왜 그러슈”라고 투덜대듯 부모 쪽을 뒤돌아본다.(사진2) 눈썰매에 태연자약하게 누워 앞도 보지 않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위태한 곡예(사진3), 아이들은 즐거우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다가 막상 고난이 닥치면 울음으로밖에 해결할 줄 모르는 나약한 인간이 아이이다. 어둠 속에서 울부짖는 아이(사진4), 애처롭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가 어른이라면 얼마나 바보 같겠나. 사진 찍는 작가를 보면서 “뭐 하슈”라 묻듯이 얼굴을 들이대는 아이, 사진을 보는 내가 더 당황스럽다.


아이에 대한 사랑, 성역만은 아니다. 13인의 아해, 이 제목은 이상의 시 오감도에서 따왔단다. 제15호까지 이어지는 오감도의 제1호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十三人의 兒孩가 道路로 疾走하오.

(길은막다른 골목이 適當하오)


第一의 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 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중략)

第十三의 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아이들을 무서워해야 하는 세상이 오고 있다는 뜻인가. 과도한 애정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아이들의 부정성을 찾아나가는 작업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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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순택

사진 2009/06/17 13:22

노순택에 대해 썼던 몇 편의 글 중 하나를 올려본다. 그의 작업에 대한 일반의 이해가 좀 더 넓어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게 되는 사람...

 

폭력에 대한 성찰


<분단의 향기>, <얄읏한 공>, <붉은 틀> 등의 작업에서 노순택은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각종 사회문제들을 들추어내는 데 힘써왔다. 거기에는 분단의 비애와 고통, 전쟁의 상흔, 이념의 편향성에서 비롯된 인간의 축소, 권력과 감시, 통제와 억압 등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한국사회의 다양한 부정성이 잘 나타나 있다. 수위를 달리하여 우리 시대를 탈 이념의 시대로 규정하는 수많은 목소리에 맞서 작가는 당당하고도 끈질기게 여전히 우리 시대는 이념의 차이가 가장 중요한 갈등을 빚어낸다고 항변한다. 이념의 퇴조는 관념적인 논의 속에서나 있는 것이지 우리 사회의 실제 모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사진작업을 통해 힘주어 강조하는 문제가 근현대사의 특수성과 맞물린 이념 갈등이나 반민주적인 정부권력, 그러한 권력이 작동하여 빚어내는 억압과 통제와 같은 단편적인 사안들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가 집요하게 수행하고 있는 작업은 근원적인 폭력이 발생하는 지점과 그 폭력이 작동하여 우리 사회를 끝없이 동물성과 야만의 상태로 몰아가는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한 폭력은 분단과 전쟁, 억압과 저항처럼 물리적인 형태로 드러날 때 쉽게 간파할 수 있는 것이지만, 작가는 예리한 눈과 민감한 감수성을 가지고 일상의 곳곳에 스며있는 사소한 폭력의 장치들을 하나하나 짚어나간다. 사소하더라도 그것이 폭력의 씨앗이라면 언젠가는 피어나 삶의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미세하고 잘 드러나지 않는 사소한 폭력의 냄새를 맡아 그것을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내 보여주는 시도가 <똥물도감>, <조류도감>, <국기사용법>, <면죄부>와 같은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작업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작가는 현상들을 전통적인 다큐멘터리 사진의 방법론을 활용하여 단편적으로 포착해내는 데서 그치지는 않는다. 현실의 모습은 그것이 하나의 현상으로 드러나기까지 복잡한 인과관계를 거친다. 현상의 배후에 숨어있는 그 구조를 밝혀내고 참뜻을 읽어내기에 카메라는 무기력하기 그지없다. 카메라는 단지 기록할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을 제대로 읽어내는 것은 고스란히 사진가의 몫으로 남는다. 이를 위해 노순택은 다양한 방법론을 끌어들인다. 일반적으로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 오던 상징과 은유를 활용하고, 피사체의 선택과 배제를 적절히 혼합하기도 하며, 텍스트를 사진과 병치하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사진은 복합적인 의미 구조를 새롭게 부여받는다.


인간이라는 동물과 동물의 삶


<똥물도감>은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주목하여 동물이 인간 세계에서 살아가는, 혹은 인간이 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작업이다. 한 때 동물이었던 인간, 혹은 지금도 동물인 인간은 동물성을 떨쳐내면서 야만과 폭력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폭력을 저지르고 인간의 사회는 야만성에 물들어 있다. 인간은 동물성을 야만이라 부르지만 정작 야만은 인간만의 것이다. 이는 인간이 여전히 동물성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까닭인가, 혹은 동물성에서 벗어나버렸기 때문인가. 아마도 인간은 한 때 동물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동시에 동물이기를 부정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동물과 유사하면서도 다를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기묘한 동물적 지위를 규정한다. 이 이상한 이중적 지위로 인해 인간은 동물의 삶을 살면서 동시에 동물의 삶에서 멀리 있기도 하다. 작가가 동물의 모습에서 인간의 냄새를 맡고 인간의 삶에서 동물의 체취를 감지해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인간의 야만성은 아마도 동물적 본성에서 온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야생 상태의 동물이 지닌 생존본능을 생각하면 그렇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을 모른다. 인간의 편에서 본 동물과 동물의 편에서 본 동물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동물성에서 벗어남으로써 비로소 인간의 품성을 찾아나갈 수 있었겠지만 그 차이 역시 인간이 규정한 것이다. 그 또한 인식의 폭력 아닌가.


밝은 하늘을 뒤로 한 채 난데없이 눈앞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동물, “누구냐, 넌”이라 외치는 작가의 외마디 비명 속에는 놀람과 두려움이 뒤섞여있다. 역광 때문에 정체를 분간하기 힘든 이 낯선 동물은 인간과 동물의 원초적인 관계에 대한 극명한 상징으로 보인다. 인간의 필요에 따라 인간의 삶 속에 끌려 들어온 동물과 이를 강제한 인간, 이질적인 두 종(種)의 만남은 본래 그런 식으로밖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목이 긴 이 동물 또한 작가 앞에서 똑같이 “누구냐, 넌”이라 외쳤을지도 모른다. 낯설고 이질적인 정체불명의 존재 앞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반응은 원초적인 두려움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질감에서 오는 낯섦과 두려움은 인간과의 관계가 차단된 야생 상태의 동물에게서 쉽게 느낄 수 있지만 인간의 곁에서 사는 동물 또한 본질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늑대를 닮은” 개도 있고, 늑대의 눈으로 매섭게 노려보는 야성을 간직한 개도 있다. 때로는 야성을 잃고 안방에서 함께 사는 애완용 개조차도 낯선 인간 앞에서는 본능적인 적개심을 드러낸다. “당돌한 놈”에서는 한 뼘 키밖에 되지 않는 인형 같은 귀여운 강아지가 태연자약하게 작가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다.


인간과 오래 함께 살아 반은 인성을, 반은 야성을 지닌 이 동물이야말로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인지도 모르겠다. 반드시 그래서가 아닐지라도 동물에게는 인간의 모습도 있다. <똥물도감>을 보면 인간과 동물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밥그릇을 비우고도 아직 부족한 듯 혀를 날름거리는 <식충이>의 개는 “배고픈 놈은 잘 먹는” 인간의 모습과 똑같다. 거대한 혀로 얼굴을 뒤덮을 만큼 쩝쩝거리며 품위를 잃어버리는 경우는 배고픈 인간에게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인간의 곁에 살며 인간을 닮아가는 동물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이 그렇게 만들어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열세 살의 노령에도 꼿꼿함을 잃지 않고 계신” “만득씨”는 사람처럼 옷을 입고 사람처럼 늙어간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본래 가깝고도 먼 친화력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고양이 탈을 쓴 우리 집 너구리”가 그렇듯 아이들은 동물 흉내를 내면서 즐거워한다. 작가 역시 <바싹 마른> 개에서 “너나, 나나, 어슬렁거리며 침 흘리고 다니기는 매한가지”라 생각하며 동물의 모습에서 자신을 본다.

그러나 필요 없는 동물은 언제라도 인간에게 버림받는다. 필요 때문에 오래 함께 살아왔어도 필요가 없어지면 금방 잊혀지는 것이 동물이다. 토사구팽이 사냥개를 비유한 것임은 그래서 흥미롭다. “지금은 사라진 청계천 삼일아파트”에서 발견된 개의 주검은 얼마나 오래 방치되어 있었는지도 모를 만큼 썩어 문드러져 마치 화석처럼 보인다. 한 때는 주인을 위해 ‘개같이’ 일했을 터임이 분명한 이 동물의 죽음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무성한 수풀 더미 위에 놓인 “죽은 개” 또한 마찬가지이다. 어렸을 적부터 묶여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목줄은 죽어서까지 목을 파고들어오고 목줄에 걸린 쇠사슬은 주검까지 따라다닌다. 평생 묶여있었을 그 녀석의 생은 정말 ‘개 같은’ 생이었을 터이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개들에게도 죽음은 여지없이 찾아온다. 인간에게 한때는 사랑받았음에 틀림없는 애완견들도 개울가에 버려져 동사하고, “동지여 돌아오라”에서처럼 집 잃은 개들은 바깥세계의 법칙을 몰라 비명횡사하기 일쑤인 것이다.


사진의 초월적 폭력


<조류도감>은 현장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유형의 사진 촬영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쓰임새에 따라 억압과 통제, 감시 등의 장치로 기능하는 사진의 권력에 대해 성찰해보는 작업이다. 작가는 사진가를 지칭하기 위해 은어처럼 흔히 사용되는 ‘찍새’라는 말을 ‘조류’로 환치하여 사진 촬영이 진실을 보여주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단지 ‘모이를 줍는’ 것에 불과하다는 냉소적인 태도에서 출발한다. 미군병사가 성조기 앞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는 장면을 촬영한 사진에서 작가는 사진의 우둔함에 대해 명료하게 언급한다. 요컨대 “이 미군이 성조기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사진은 보여주지 못”하며 아울러 작가 역시 “성조기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사진은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조류도감>에 등장하는 ‘찍새’에는 각종 언론사의 사진기자를 비롯하여 ‘모이의 종류가 다른’ 각 분야의 작가들, 기념사진을 찍는 일반인, 자료로 쓰기 위해 사진을 찍는 화가나 학자 등이 두루 망라되어 있다.


사진은 각자의 필요와 목적에 따라 생산되게 마련이다. 그것이 사진의 의미를 바꾼다. 사진의 권력은 사람들에게 현실을 전달함으로써 그에 대해 반응하도록 하는 데서 그치지만은 않는다. 어떤 점에서 이러한 단순 구조란 실제로는 없다. 사진을 통한 메시지의 전달에는 이미 사진의 선택에서부터 필요와 목적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특별한 의도 없이 촬영한 사진의 경우에도 수용의 단계에서 목적은 애초의 맥락과 상관없이 개입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진 찍는 행위는 때로는 장려되고, 때로는 금지된다. 거기에서는 무엇을 찍느냐보다 누가 찍느냐가 더 중요한 고려사항이 된다. 사진은 단지 보여줄 뿐 말이 없기 때문이다. 사진의 우둔함은 무고하지만 해석은 위험을 수반한다. 그래서 작가는 결국 사진은 위험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사진가는 ‘위험한 새’이다.

사실 사진은 근원적으로 폭력으로부터 비껴가기 어렵다. 사진은 모든 개체를 타자로 전환시킨다는 점에서 그렇다. 가장 따뜻한 마음과 정의로운 생각을 지닌 사진가라 할지라도 본래 스스로 주체인 모든 개체를 타자화시키는 사진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타자에 대한 존중의 의식에도 불구하고 내게 다가오는 개체를 타자로밖에 인식할 수 없는 이러한 구조를 데리다는 초월적 폭력이라 불렀다. ‘찍새’들에게 부여된 이 폭력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모른 척할 수는 없다. 적어도 그들은 윤리의 잣대로 재단할 수 없는 이러한 폭력에 대해 명료하게 의식해야 하며 스스로가 ‘위험한 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더 큰 폭력은 언제라도 발생할 수 있다. ‘찍새’들의 진정한 윤리는 그 지점에서 얘기되는 것이 마땅하다. 스스로 주체인 모든 개체를 타자로 추락시키는 사진의 폭력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작업노트에서 작가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사진가가 타인을 도와야 하는지, 혹은 사진을 찍어야 하는지의 당혹한 선택을 사이에 두고 고민한다. 선택은 쉽지만 판단은 어렵다. 그 상황에서 모든 ‘찍새’들은 찍는다. 그것이 이른바 ‘찍새’다. 작가는 이러한 상황을 “나는 찍는다, 고로 찍는다”고 말한다. 그것이 ‘찍새’의 윤리가 아닐까. 데리다는 초월적 폭력은 폭력의 부정성이 최소화된 상태이며 그것마저 저지르지 않는다면 침묵과 무의미라는 더 큰 폭력에 맞설 수 없다고 항변한다. 그것이 다른 한편으로는 폭력의 윤리이다. 그 또한 쉬운 선택이지만 판단은 어렵다.
 



그래서 수많은 ‘찍새’들은 현장에서 우선 찍고 본다. 판단은 나중에 하는 것이다. 하나의 사건 앞에서 수십 명의 ‘찍새’들이 셔터를 누르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라 할만하다. 작가는 “찍새들이 있기에 우리 사회는 나아질까, 나빠질까”생각하며 번민하기도 하지만 자신도 역시 동류에 속하기에 현장에서는 우선 찍는다. 그것이 현장의 윤리이다. ‘찍새’들은 <랑데뷰>에서처럼 무시무시한 총대 앞에서도 찍고, 어둠 속에서도 찍고, 절벽이나 전봇대와 같은 위태로운 장소에서도 찍고, 엎드려서도 찍는다. 하기야 죽어 사진으로만 남은 사람도 찍는데 어떻게 찍는 것이 무슨 대수겠는가. 하지만 이처럼 침묵에 맞선 ‘찍새’들의 저항이 어쩔 수 없는 최소한의 행위라 할지라도 폭력의 찌꺼기는 남는다. <조류도감>은 그 점을 알면서도 폭력을 저질러야 하는 괴로운 ‘찍새’들의 입장에 대한 쓸쓸히 고백이기도 하다.


국기의 상징적 권력


<국기사용법>에서도 힘과 권력, 폭력에 대한 성찰은 계속된다. 태극기가 지닌 상징적 권력이 얼마나 미시적으로 우리의 일상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가를 보여줌으로써 권력이 미치는 범위를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국기의 지배력은 강제성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상징적 권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국기가 지닌 권력, 혹은 국기에 부여한 권력은 어떠한 물리적 권력보다 강하다. 그 앞에서 감히 반항할 생각조차 품지 못할 때의 권력은 전횡을 부리기 마련이다. 국기의 지배력이 그런 것이다. 국기가 지닌 권력은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와 무관할 때만이 정당한 것이 된다. 국기는 국가의 상징이지 특정 집단의 상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국기는 흔히 동원되곤 한다. 절대 권력에 의탁하여 집단의 이익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숨은 의도가 거기에는 깔려있다.


작가는 <국기사용법> 연작을 구성하는 각 사진에 효과적으로 제목을 붙이면서 권력이 남용되는 사례를 흥미롭게 들추어내고 있다. <술집장식용>에서 국기는 공동체의식을 교묘히 자극하여 매상을 올리는 전략으로 사용되며, <경영대학원 체육대회용>에서 엿볼 수 있듯이 집단의 단합을 위해 등장하기도 한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국기의 일반적인 용도는 역시 분단 문제와 관계할 때 가장 잘 드러난다. <북한 규탄용>이나 <뽈갱이 내려다보기용>에서의 태극기는 또 다른 나라 북한에 대한 극명한 차별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태극기는 성조기에 대한 친화력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한미혈맹지속용>에는 “혼연일체가 된 태극기와 성조기”가 티셔츠에 새겨져 있고, <가슴부착용>에는 군복차림의 남자가슴에 태극기가 아닌 성조기가 덩그러니 매달려 있는 것이다.


서로 다른 세계관과 다른 이념, 극단적으로 다른 역사의식을 지닌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한국사회에서 태극기의 용도는 참으로 천차만별이다. <전쟁기념용>에서의 태극기와 <추모용>에서의 태극기는 얼마나 다른가. 이처럼 거대한 생각의 차이를 가로질러 국기를 든 사람의 행위는 국기의 상징적 권력 덕분에 쉽게 용인되는 것이 보통이다. 어쩌면 그 이유 때문에 국기를 앞에 세워 행위를 저지르는지도 모르겠다. 행위의 정당성과 무관하게 국기 앞에서 불손해질 수는 없는 까닭이다. 심지어는 정부권력조차도 국기의 상징적 권력 앞에서는 무기력할 때가 많지 않던가 말이다. 국기라는 상징적 권력의 횡포가 국기 자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를 가져다 쓰는 이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 점은 사진의 활용에서와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상징의 남용은 커다란 폭력을 낳는다. 태극기 앞에서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소총을 든 미군병사가 태극기의 전면에 등장하는 <국토수호용>에서의 반쪽짜리 국기는 반감만을 낳는다. 그것은 <독도수호용>에서처럼 허리가 굽은 노인이 들고 있는 태극기의 소박한 권력을 알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저열한 폭력인 것이다. 국기의 권력이 그렇게 남용될 때 국민은 국기에 부여한 상징적 권력을 거둔다. <짐 덜기용>이 보여주듯 국기가 더 이상 정당한 권력이기를 그칠 때 그것은 짐이 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쓰레기 취급을 당한다.


종교권력의 변신


<면죄부> 또한 <국기사용법>에서처럼 상징적 권력과 그 권력이 왜곡되는 지점에 주목한 작업이다. 한국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이 신이라는 절대 권력의 독선적인 남용으로 배타적 종교로 변질되어 가는 모습에 천착한 이 작업에서 작가는 <조류도감>이나 <국기사용법>에서 제기하고 있는 권력의 활용과 폭력의 관계를 다른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 종교적 믿음 또한 이념과 마찬가지로 도구적으로 사용될 때 폭력을 수반한다. 기독교 신앙의 상징인 십자가는 기독교인에게만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맞다. 마치 태극기가 한국인, 더욱 정확히는 남쪽의 한국인에게만 국가권력의 상징일 수 있듯이 말이다. 그 권력은 강제로 행사되는 것이 아니며 자발적으로 그 힘을 수긍할 때만 생겨난다. 그러한 종류의 상징을 권력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에게 권력을 강제할 때 폭력은 위험한 수위에 이른다. 문제는 그 권력이란 것이 본래부터 대상 자체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사진을 필요에 따라 활용하듯이, 국기의 신성함을 용도에 따라 변형시키듯이 종교적 믿음과 그것의 상징 또한 남용될 수 있다. 자신의 신앙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경우, 신의 절대 권력을 세속적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해 이용하는 경우 이러한 폭력은 흔하게 발생한다.


<하늘엔 영광, 땅엔 그을음>에서 도로 한복판에 놓인 거대한 십자가와 타다 남은 잿더미는 집착에 가까운 신앙이 얼마나 난폭한 행위로 돌변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행위를 저지른 당사자에게는 신념에서 나온 정당한 행위였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광란과도 같은 도발로 귀착하고야 마는 이러한 행위는 한국사회에서 빈번하게 발생한다. 광적인 신앙은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라 언어의 폭력으로도 나타난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에서 볼 수 있듯 자기들의 신을 믿지 않으면 사후에 잔인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공갈과도 같은 언어는 얼마나 난폭한가. 한편 물리적 폭력이나 언어의 폭력이 아닐지라도 신앙이 믿음을 강요할 때 폭력은 다른 형태로 우리 곁을 맴돈다. 절대자의 상징으로서의 십자가는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존중의 대상이다. 타인에 대한 존중에서 출발하는 근원적인 윤리의식은 타인에게 절대자인 그 상징에 대한 존중으로 확장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십자가는 절대적이지는 않더라도 상대적 권력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보편적인 윤리의식의 확장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절대성의 상징인 십자가가 도시 전체에 퍼져있는 모습은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신성의 속화이며, 사회학적인 의미에서는 종교권력의 확장 내지는 사회적 침투이다. 급속도로 확산되는 종교권력은 <모든 죽음을 관장하시는...>에서 볼 수 있듯이 공동체의 거주지와 무관한 야산까지 퍼져 있으며, <아파트에 강림하신>에서처럼 대규모 아파트단지의 벽면에도 자리 잡고 있다. 타인의 종교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한편 종교권력이 정치적 당파성을 띠고 집행되는 경우도 다반사이다. 인권문제처럼 종교와 이념의 차이를 초월한 보편성을 설파하면서도 <어린이 천국교회>의 문구가 보여주듯 이념적 편향성이 종교권력과 결탁해 있는 것이다. 그 권력은 <꿇어!>에서 작가가 풍자적으로 제목을 붙인 것처럼 강제적 명령을 숨기고 있으며, “무릎 꿇고 회개하고 나라위해 기도하자”라는 문구가 말해주듯 신앙과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뒤섞어 특정종교를 보편주의로 제시하기도 하는 전술적 권력이기도 하다.



그 밖의 단상들


이처럼 한국사회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미시적인 폭력의 구조와 권력의 장치들을 인식하여 시각의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노순택의 작업은 <잡생각>에서처럼 단상의 형태로 펼쳐지기도 한다. <빨갱이 병사는 남조선에서 태어났다>는 동포를 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기막힌 우리 현실에 대한 통렬한 상징이다. 적군을 내부에서 생산한다는 이 기발한 착상은 사실 엄밀히 따져보면 맞는 말이다. 사격연습을 위한 표적인지, 인민군 병사에 대한 단순한 표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작가의 말처럼 “인민군 병사를 양성하는 곳은 북조선만이 아니”어서 남한이 인민군 병사를 필요로 한다는 가혹한 역설을 상기시켜준다. 한편 <전쟁은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지속적으로 전쟁연습을 벌이고 있는 남북한의 현실에 대한 풍자이다. 창공 가득히 피어오르는 화염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이 땅에서 벌어지는 가상의 전쟁을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방관자의 자태를 하고 있다. 작가는 이 전쟁연습을 지긋지긋하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볼거리를 제공”하며, “구경꾼을 양산”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처럼 모순된 현실 속에서, 나아가 이러한 모순이 극명하게 펼쳐지는 사건의 현장에서 작가는 말할 수 없는 비애를 느낀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농성현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쌀알과 접시, 구겨진 종이컵을 찍은 <당신들은 불린 쌀을 엎었다>는 사건의 핵심과 무관한 부수적인 사태라 할지라도 결국은 생존 문제라는 본질을 건드리고 있다. “따뜻한 아침밥을 짓기 위해 누군가 지난 저녁 물에 담가둔 쌀”, 그 불린 쌀이 바닥에 뒹굴고 있는 모습은 안타까움을 넘어 비애감마저 자아낸다. 현장의 긴박한 사태가 휩쓸고 지나간 후에 뒹굴고 있는 불린 쌀알은 그렇게 작가의 가슴에 파문을 던졌던 것이다. 생존권을 둘러싼 약자와 권력자간의 분쟁에서 작가가 느끼는 안타까움은 간절함으로까지 나아간다. <항복합니다...>에서 작가는 “제발... 항복하십시오...”라고 애원하기에 이른다. “해군기지 결사반대”라는 깃발과 바위틈에서 기적같이 피어오른 화초에 흰 속옷을 걸어놓은 모습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말리기 위한 것인지 항복 의사의 표시인지 알 수 없는 이 기묘한 장면에서 작가는 생존을 위한 싸움에서 생이 깎여나가는 현실을 보았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어느 편이 됐든 “제발... 항복”해서 이 지루하고 고단한 싸움이 끝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이 작가의 궁극적 바람이 아닐까.


노순택이 한국사회의 구석구석에 퍼져있는 폭력의 장치와 권력이 미치는 범위를 들추어내는 작업에는 예민한 후각을 지닌 동물적 본능과 차분한 반성적 사유가 공존한다. 그것이 중요한 덕목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근저에는 폭력을 멀리 하고자 하는 마음과 그것이 진정 사라져버리기를 바라는 간절한 애원이 있다. 그것이 작가를 집요한 현실주의자로 만드는 힘이자 실천의 윤리이다.




Posted by paixa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