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그림’으로 환생한 오브제 식물
<마술적 리얼리티(Magical Reality)> 연작에서 현실의 생경한 모습을 찾아내 조형성을 부여하는 데 몰두해 왔던 구성수가 신작을 들고 나왔다. 일년생 식물을 마치 식물도감에서나 볼 수 있는 자료사진의 형식으로 촬영하여 모아놓은 <Photogenic Drawing>이 그것이다. 이 연작에서 작가가 끌어 모은 식물은 싸리와 고사리, 수선화, 목화에서부터 석위류, 눈꽃, 성유매, 향기별꽃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식물의 목록이나 사진의 형식을 고려하면 이 작업이 식물의 표본을 채집하여 그에 대한 지식의 체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꽃의 신전>에서 개별 식물의 특성을 그려내는 데 몰두했던 손턴(Robert Thornton)이나 방대한 양의 식물 표본을 채집하여 사진으로 자료화시켜 낸 칼 브로스펠트(Karl Blossfeldt)의 경우처럼 말이다. 구성수의 이번 작업도 이런 맥락에서 볼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뷔퐁의 <박물지>나 디드로의 <백과전서>와 달리 구성수의 <Photogenic Drawing>은 ‘지식’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이는 작업의 메커니즘과 제목만 보아도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다.
우선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뉘는 작업의 메커니즘을 보자. 첫 번째 유형은 식물의 표본을 채취하여 말린 후 두 장의 유리판 사이에 끼워 넣고 뷰 박스 위에 올려놓은 상태에서 촬영한 것이다. 두 번째 유형은 찰흙에 식물 표본을 눌러 음각을 만들고, 여기에 백 시멘트를 부어 양각을 떠낸 후 그 위에 본래 식물의 모습에 가깝도록 채색을 하여 이를 다시 사진으로 촬영한 것이다. 음각과 양각, 채색의 3단계를 거쳐 탄생한 식물의 형상은 사진으로 귀결하는 셈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두 유형의 사진에 작가는 <Photogenic Drawing>이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이는 사진 발명가였던 영국인 탈보트의 용어이다. 탈보트의 식물 표본사진은 원래 음화로 제작된 것으로, 이를 원판으로 삼아 여러 장의 양화를 찍어낼 수 있는 사진 복제의 길이 열린다. 그런 점에서 구성수의 식물 표본사진은 탈보트의 사진에 대한 메타포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작가는 170년 전의 낡은 사진 개념을 지금에 와서 다시 문제 삼는 것일까?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놀라운 발전이 이루어 낸 변화무쌍한 사진 이미지의 생산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아마도 작가는 170여 년 동안 급속히 변화해 온 기계적 이미지의 생산 조건과 그 변화가 야기한 사진 개념의 혼란에 대해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답을 구하려 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이번 작업은 사진사에 대한 해석이자 사진 개념에 대한 작가의 입장 표명이기도 하다. 실상 현대미술을 이끌어 온 주요한 추동력 중의 하나가 예술 행위 자체에 대한 질문이었던 점을 염두에 두자면 구성수의 이번 작업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질문에 대한 작가의 입장은 어떤 것인가?
사진의 기원을 발명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찾아내려는 관점에서 보자면 사진은 15세기에 고안된 원근법적 시각을 기계적인 방식으로 완성시켜낸 이미지이다. 가시적인 세계를 관찰자의 시점에 따라 기하학적으로 배치하고자 하는 이 기획을 완성하는 데는 카메라 옵스쿠라와 같은 기계 장치의 도움이 있었다. 이 장치의 현대적 형태가 카메라이다. 카메라 옵스쿠라는 본래 과학적 지식을 찾아나가기 위한 도구였다. 16세기의 이른바 ‘자연 마술’에서부터 17세기의 자연철학에 이르기까지, 혹은 몇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하에 있었던 스콜라 시대의 ‘자연학’이나 아랍철학자들의 과학 연구에서 이 도구는 자연 현상의 관찰에 이용되었다. 그런 점에서 사진에 대한 인류의 욕망은 관찰을 통해 세계에 대한 지식을 구축하고자 하는 욕망과 맞닿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사진 발명자 중의 한 명인 탈보트 역시 어떤 점에서는 이러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던 서구 지식인의 전형이었다. 천문학과 수학, 광학에 정통했으며 50여 편에 이르는 과학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던 그는 후일 앗시리아의 설형문자를 해독해낸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진을 단지 중세의 자연학과 근대과학의 시대를 관통해 온 지식에 대한 욕망의 부산물로만 볼 수는 없다. 탈보트 스스로가 자신이 개발한 사진술에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도구라는 의미의 ‘칼로타입(Calotype)’이라는 이름을 붙였듯이 사진은 애초부터 자연의 경이에 대한 찬미의 언어로 등장한 것이기도 했다. 이제 아름다운 이미지는 연필 끝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상자 속에서 빛의 도움으로 얻어낼 수 있게 되었다. 자연은 스스로 자신의 신비를 그려낼 수 있는 도구를 갖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게 해서 화가는 자연을 아름답게 그려내야 하는 노동에의 의무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Photogenic Drawing>은 새로운 이미지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르네상스 회화의 종착지, 즉 그것의 완성이기도 하다.
이제 ‘자연의 연필’로 그려낸 구성수의 <Photogenic Drawing>이 어떤 구조를 하고 있는가를 보자. 말린 식물을 유리판 사이에 끼워 촬영한 첫 번째 유형은 고전적인 방법에 속하므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작가 스스로도 이 유형은 두 번째 유형을 위한 준비 정도로 생각하는 듯하다. 자연(실제 식물)을 찰흙에 눌러 만들어낸 음각과 거기에 백 시멘트를 부어 얻어낸 양각, 그 위의 채색을 하여 완성한 인공 식물은 최종적인 사진 이미지의 원형이다. 이처럼 복잡한 과정이 어째서 필요한 것일까. 여러 단계의 수작업을 거쳐 완성한 인공 식물이 자연 상태의 식물보다 낫다는 뜻일까.
자연 상태의 식물을 촬영한 첫 번째 유형과 비교를 해보면 이 차이를 엿볼 수 있다. 뷰 박스 아래에서 비추는 빛에 투영되어 반투명 상태로 조직을 드러낸 마른 잎들의 경우 표면의 디테일은 다소 훼손된 상태이다. 기계적 시각의 엄밀함과 정밀성을 추구해 온 작가에게 이런 결과는 다소 의외다. 따라서 그의 관심은 식물을 정교하게 재현하는 것 보다는 자연(식물)이 빛의 은총을 받아 저절로 자신의 형태를 드러내도록 놓아두는 데 있다. 두 번째 유형은 첫 번째에 비해 한결 정교해 보인다. 잎의 표면에서 번져나가는 초록색의 스펙트럼은 아주 넓고 줄기에 매달린 꽃의 모양과 색상의 순도도 매우 높다. 기기묘묘한 형태로 바탕에 파묻힌 줄기와 뿌리 또한 온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나아가 정면 약간 위쪽에서 떨어지는 조명이 만들어낸 그림자는 식물들의 형상에 입체감을 준다. 요컨대 첫 번째 유형이 평면적이라면 두 번째 유형은 그에 비해 입체적이다. 결국 이 인공식물을 촬영한 두 번째 유형의 사진은 자연 상태의 식물을 촬영한 것에 비해 시각적으로는 실재에 더 가깝다.
한편 부조와 채색 작업을 통해 얻어낸 모본은 그 자체로서 이미 고전적인 형태의 예술작품에 속한다. 하지만 구성수는 사진 촬영보다도 훨씬 고된 노동을 투자한 이 모본을 ‘작품’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그에게 이 ‘작품’은 완성본이 아니라 사진을 위한 ‘밑그림’ 정도로 간주될 뿐이다. 사진을 보고 그림을 그렸던 화가들에게 사진이 ‘밑그림’용으로 활용되었다면 이제 상황이 역전되는 셈이다. 이는 퍼포먼스 자체보다 퍼포먼스를 기록한 사진이 ‘작품’으로 등장하는, 결국 사진을 위해 퍼포먼스를 하는 현대 작가들의 논리와도 일맥상통한다. 물론 최종 작품으로 제시된 사진에 이 모든 과정은 생략되어 있지만 그 점이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빛으로 그린 그림”이 미술사의 맥락 속에서 차지하는 지위이다.
추정컨대 부조와 채색 과정을 거쳐 탄생한 오브제 식물은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 점에 연연하지 않고 이 ‘작품’을 촬영한 사진을 궁극적인 예술작품으로 제시하였다. 요컨대 그에게는 오브제를 만들어내는 섬세한 손보다 셔터를 누르는 침착한 손이, 형상을 빚어내기 위해 사물의 윤곽을 더듬는 눈보다 주어진 사물을 냉정하게 포착하는 기계적 눈이 더 요긴하다. 침착한 손과 기계의 눈이 지닌 가치를 변론하기 위해 작가는 섬세한 수작업을 투자한 후 결국 그것을 버렸다. 부질없는 노동이었다고 말할 것인가. 이미 170년 전에 영국인 탈보트는 동일한 가치를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그 가치의 정당성이 입증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구성수의 <Photogenic Drawing>은 그 가치를 재확인함으로써 정당화 담론이 종결된 지점에서 요구되는 사진의 화두가 무엇인가를 찾아나가는 시도이기도 하다.
(월간미술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