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글'에 해당되는 글 48건

  1. 2011/12/19 체력
  2. 2011/06/12 김여사 (1)
  3. 2011/05/05 애완동물
  4. 2011/04/27 승부 (2)
  5. 2011/04/23 신문
  6. 2011/04/17 블랙 신라면 (4)
  7. 2011/03/30
  8. 2011/03/23 세속적인 삶
  9. 2011/02/15 갈수록 어렵다 (2)
  10. 2011/02/07 중고책

체력

잡글 2011/12/19 23:16
부모로부터 양질의 신체를 물려받았다고 여기는 터라 운동선수들만큼은 아니지만 기초 체력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는데, 호, 나이가 들어가니 여지없다. 요 근래 몇 달 체력 저하에서 비롯된 면역력 저하로 각종 질병에 시달리다보니 몸은 쓰면 닳아지는 물질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음과 몸이 따로 노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상,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게 되는 현상, 허나 자연스러워 별다른 이의 없이 그저 그러려니 하고 체념하거나 이를 연기시키기 위해 운동이나 영양제 복용으로 그에 반항하는 그런 현상, 어찌해야 하나 싶다. 한번도 술담배를 끊겠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는데, 한번 고려도 해보고, 운동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고, 참 별 생각을 다하게 된다. 따지고 보면 우리 할머니는 내 나이 때 이미 '할머니'였는데, 신체 나이가 자꾸 연기되다보니 젊은 체 하게 된다는 생각도 든다. 좌우간,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 즉 자신을 속이지 못한다는 것, 다만 정신이 주인이라 자청하는 '나'만 모르고 있다는 것. 그리 보면 몸만 우둔한 게 아니라 의식 또한 우둔하기 짝이없다. 저자가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시인이 '젊음을 탕진한 죄'라 썼던 대목이 생각난다. 맥락은 다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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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사

잡글 2011/06/12 17:23

항간에 '김여사 시리즈'가 유행이라 하여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았더니, 와우! 장난 아니다. 운전 미숙자들을 일컫는 말인데, 문제는 이 분들이 위험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 주변 운전자들은 위험 상황을 즉각 인지하는데 본인들은 인지하지 못한다, 이게 핵심인 듯. 따라서 위험하게 운전하는 '김여사'들은 항상 사고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주변 운전자들도 그렇다.

'김여사' 시리즈와는 좀 다르지만 대담하고 용감무쌍한 아줌마들에 대한 얘기 한 토막, 아내의 목격담이다. 무단횡단하던 아주머니가 교통경찰에게 걸렸던 모양이다. 아마 교통경찰이 길 맞은 편에 있는 걸 보지 못했던 듯. 교통경찰, 자기 앞으로 태연히 걸어오던 이 아주머니에게 "무단횡단 하셨습니다, 어쩌고 저쩌고..." 교통경찰을 한번 쓱 쳐다보던 아줌마, "뭘, 그런 걸 가지고 따지고 그래요? 아, 그럼 다시 건너가면 될 거 아녜욧!!!" 하며 유유히 되돌아가더란다.

상식을 넘어서는 파격, 이런 게 아줌마들한테는 있다. 이 파격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하면 좋을텐데 아쉽게도 역방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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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완동물

잡글 2011/05/05 00:31
집에 돌아와 보니 난데없는 동물 한 마리가 있다. 기겁을 하여 물어보니 어린이 날 선물로 아이가 졸라서 한마리 얻어왔다는 것. 종자가 머냐 물어보니 쥐, 종류란다. 기니피그라는데, 그럼 돼지 아니냐 했더니 몰모트 종류라는데, 생김새로는 잘 몰겠고, 돼지처럼 통통하다. 집에 동물 들이지 않기로 암묵적인 합의를 보고 있던 차에 갑자기 쥐 종자가 하나 들어오니 아, 심란하다. 다행히 강아지처럼 촐싹대지 않고 소리도 내지 않아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이지만, 아, 그래도 신경쓰인다. 쥐라면 딱 질색인데, 왜 하필 종자를 골라도 쥐를...

동물을 제 자식 못지 않게 정성들여 키우는 사람들도 있는 것으로 알지만 나는 그럴 자신이 없다. 그리고 아무리 애완동물에 애정을 쏟더라도 사람한테 쏟는 정성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나는 죽었다 깨나도 그렇게는 못하는 사람. 하여 이 돼지 닮은 쥐한테 정을 주지 못할텐데, 아이들이 벌써부터 눈치를 채고 귀엽다, 예쁘다, 온갖 사탕발림을...

  


인간이 최초로 동물을 사육하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 시대부터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 때는 인간이 동물과 자신을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다. 한편 후기 구석기까지만 하더라도 인간은 여전히 동물성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었다(이런 관점이 있다). 어쨌든 이 시기부터 생산량은 이전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만큼 증가한다. 동물을 필요에 따라 사육하면서부터다. 동물에 대한 지배가 시작되는 셈인데, 이건 사냥과 다르다. 사육을 한다는 것은 사실 사냥보다도 더 잔인하게 지배력을 행사하는 행위다. 도축을 하기 위해, 나중에 필요할 때 잡아먹기 위해 살을 찌우는 거니까... 사냥은 어떤 점에서 '자연스러운' 행위였다. 자연생태계에 존재하는 먹이사슬, 이런 개념과도 비슷하다고 봐도 되겠다. 하지만 사육은 자연에 역행하는 것, 사람만이 그것을 한다. 그렇다면 사육이야말로 참 사람다운 짓이라 할 수도 있겠다.

동물을 왜 키울까. 잡아먹기 위한 사육이나 사냥, 경호 등의 필요를 제외한 다른 이유가 있는 셈인데, 애완동물은 그래서 참 특수한 형태의 사육이다. 애완동물 애호가라면 사육, 이런 표현보다 공존, 이런 말을 선호하겠지만, 글쎄, 동물이 알아서 밥 챙겨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사육은 사육이다. 외로움 때문일까. 하긴 로빈슨 크루소우에게 개 한마리의 의미는 남달랐으니 이해가 갈 법도 하다. 하여 인터넷 검색을 해보던 아이가 기니피그는 외로움을 많이 타서 혼자 있으면 죽는 경우도 있다고 한 마리 더 사달라는데, 헐, 사줘야 할 모양이다. 외로움을 타면 죽는 동물이라니, 사람보다 더 센티멘탈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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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

잡글 2011/04/27 02:36
술 한잔 하고 늦게 들어와 좀 부족하여 한잔 더... 들어오자마자 궁금했던 오늘 비씨카드배 결과를 보니 이세들 반집 승. 이세돌과 구리, 숙적이 맞붙었다. 5번기 승분데 1:1에서 오늘 이세돌이 이겼다. 바둑에서 반집은 원래 반상에는 없는 것, 하여 누가 이기더라도 이상할 것 없는, 그리고 운이 따르는 그런 승부다. 옛날에는 그렇게 여겼다. 그런데 이창호가 등장함으로써 반집을 과학으로 만들었다. 반상에 없는 반집, 이걸 과학적으로, 아니 수학적으로 계산하여 필연으로 만드는 승부법이 이창호 이후의 바둑 패러다임이다. 그렇게 보면 이창호는 바둑의 패러다임을 바꾼 사람이다. 좌우간, 이세돌은 이창호의 바둑 패러다임을 다시 바꾸어 계가까지 가기 이전에 상대가 게임을 포기하게 만드는 그런 패러다임을 제시했는데, 오늘은 반집으로 이겼다. 힘들게 이긴 것이다. 혹은 질 수도 있었던 승부다.

승부, 관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주 흥미진진하고 볼 만한 것인데, 실제 당사자들은 어떨까. 상금이 몇 억씩 왔다갔다하는 그런 승부에서 사람이 초연해질 수 있을까 싶은데, 결국 승부를 결정짓는 관건은 냉정함이다. 오늘의 승부에서도 그랬다. 구리, 중국의 초일류기사인 이 사람은 오늘 승부에서 초조함을 이기지 못해 상대방의 집에 뛰어 들어가 살 수 없는 돌들을 보태줌으로써 반집을 졌다. 섣불리 뛰어들지 않고 침착하게 계산을 했다면 넉넉하게 이길 수 있었던 게임이었다, 고 기력이 센 프로기사들이 관전소감을 올려놓았다. 뭐, 이런 경우는 바둑에서 비일비재한 일이다. 이창호는 침착, 냉정을 잃지 않아 10년 이상 세계를 호령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승부의 세계란 비정한 것이다. 기계처럼 생각해야 하는 셈인데, 사람이 기계와 비슷해지지 않고서 그리 할 수 있는 경우는 도통한 사람, 초탈한 사람, 이런 경우밖에는 없다.

승부, 내가 이기거나, 혹은 내가 지거나 둘 중 하나다. 비기는 경우? 없지는 않지만 그리 하려면 상대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나야 한다. 아무리 월등해도 자칫하면 지거나 혹은 이긴다. 승부란 따지고 보면 참으로 잔인한 것이다. 이긴 사람과 진 사람의 차이가 너무 커서, 이긴 사람은 영웅이 되고 진 사람은, 뭐 그냥 패배자가 된다.  승부에서 진 사람은 참, ...,  괴롭다. 승부에 이긴 사람은 참, ..., 똑같이 괴롭다, 아니 괴로워해야 하는 것이 맞다. 자기가 패자를 만들었으므로, 자기 때문에 상대가 패자가 되었으므로. 실력이나 운, 이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쨌든, 결국은 내가 상대를 패자로 전락시켰다는 것은 구조와 상관없이 폭력의 진원지가 나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아예 처음부터 승부를 포기해야 하나? 이것도 코메디다. 왜냐, 나는 미리 패자를 자청하고 나섬으로써 상대를 승자로, 즉 폭력의 주체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희생을 자처하는 희생물이 떳떳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상대는 자기도 모르게, 의지와 상관없이 나 때문에 폭력을 저질러 버리는 셈이다. 그래서 승부라는 사태가 발생하는 순간 모두가 폭력의 구조 속에 얽혀들어갈 수밖에 없다. 하여 승부를 피할 수 없다면 어찌해야 하나?  

승자독식의 사회, 참 인간답지 못한 사회다. 패자를 감싸안지 못하는 인간, 나아가 그런 사회는 참으로 비정한 인간, 비정한 사회다. 어쩌자고 이렇게까지 되었나 싶지만, 생각해 보면 문명사란 늘 그랬다. 패자를 만들지 않는 그런 승부란 불가능한 것일까? 나이브한 생각이지만 진지하게 고려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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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잡글 2011/04/23 00:06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인물 스완(주인공 마르셀이 닮고 싶어했던 인물, 결국 질투심에 눈이 멀어 오데뜨라는 고급 창녀와 결혼하면서 딜레탕트로 전락하는 고상한 인문주의자)은 신문을 경멸한다. 신문은 하찮은 것에 주의력을 돌리게 하며, 본질적인 것이 씌어있는 책을 한평생 서너권밖에 읽지 않는 우리로 하여금 하잘 것 없는 내용을 읽는데 시간을 낭비하도록 하기 때문이라는 것.

저녁에 잠깐 인터넷 신문 몇 군데를 살펴보니 정말 그렇다. 조선일보 인터넷 판의 머릿기사는 온통 서태지, 이지아 관련 기사로 도배가 되어 있고, 한겨레 판은 엄기영 후보쪽 불법 선거운동, 오마이뉴스도 같은 내용이 올라와 있다. 프레시안은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가고, 다른 신문들은 들어가보지도 않았다. 한심하여 르몽드 판을 보니 시리아 정부군이 실탄을 발사하여 시위군중을 해산시켰다는 기사가 톱이다. 바로 아래에 올라와 있는 기사는 아이폰, 아이패드에서 사용자들의 위치추적을 해왔다는 기사가 있고, 바로 또 아래는 애플의 소송에 맞서 삼성도 소송을 걸었다는 기사가 올라와 있다.

원래 신문을 좋아하지 않지만, 정신 산만하게 하는 데는 뭐 있다. 그런데 르몽드 문화면을 클릭해보니 호, 나윤선 관련 기사가 톱으로 올라와 있다.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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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신라면

잡글 2011/04/17 01:33
오늘의 야식은 신제품 블랙 신라면. 봉지를 뜯어보니 스프가 셋이다. 사골스프라는데, 물속에 투하하면서 보니 사리곰탕면 스프와 비슷하다. 맛은 글쎄다... 마케팅용 멘트는 "진하고, 구수한", 뭐 이런 말이었던 것 같은데, 먹어보니 "텁텁하고, 느끼한" 쪽에 가깝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니 진하고 구수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명품 신라면 특유의 깔끔하고 시원한 국물맛이 사골스프 때문에 반감된 듯. 하긴 내가 국물을 그리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설렁탕도 일부러 찾아 먹지는 않고, 곰탕도 하동관 곰탕 정도가 아니면 잘 먹지 않는다. 해장도 국물이 있는 음식만 고집하지는 않는다. 그냥 밥만 있어도 되고 해장 짜장, 해장 햄버거, 이런 것도 상관없다. 뭐 열악한 환경에 적응하다보니 그리 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비교우위라는 것이 있기는 하다... 어쨌든 국물은 시원한 게 좋다. 생태탕, 대구탕도 내장 넣고 오래 끓여 진해지면 별로라, 한소끔 끓으면 바로 먹는 걸 선호한다. 물론 내장, 곤이 등은 익자마자 낼름.

라면도 국물은 잘 먹지 않아 대개는 버리는데, 하여 요즘은 볶음라면으로 레시피를 바꿨다. 물을 정량의 1/3정도만 넣고 센불에 끓여 국물이 닳아지면 숙주, 파 등의 야채를 넣고 달달 볶아 먹는다. 스프는 당근 절반, 때에 따라 1/3정도만 넣는다. 이게 은근 맛이 괜찮아서 아이들이 그렇게 끓여달라고 주문하기도 한다. 블랙 신라면은 그렇게 끓일 라면이 아닌 것 같고, 어쨌든 내 취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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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글 2011/03/30 00:48
나이가 들면 사람이, 쩝, 약해진다. 사람들과 충돌하는 것도 피하게 된다. 성질 같아선 뭐라 한마디 하고 싶은데, 귀찮고, 저런 사소한 것에 에너지 낭비해서 뭐하겠나, 이런 생각도 들고, 하여 그냥 넘어가는 일이 많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는데, 이게 나이들어가는 징조인가 싶기도 하고, 이게 원래 맞는 건가 싶기도 하고 그렇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과 다투는 걸 일부러 피하진 않았다. 충돌이 불가피하면 충돌하고, 총대 매고 싸울 일이 있으면 싸우고 그랬는데, 아, 이젠 정말이지 귀찮고 피곤하고 그렇다.

에피소드 하나. 수년 전 일이지만, 마트에서 생긴 일이다. 장을 보고 계산대 앞에 줄을 서 있는데, 일이 (안)되려고 그랬는지 사람이 많았다. 줄, 이게 좀 길었다. 세월아 네월아 카트에 기대어 서있는데, 줄이 길다 보니 내가 서있는 줄이 아주 애매하게도 앞에서 두 줄이 되어버렸다. 뭐 종종 있는 일이다. 그런데 나보다 한참 뒤에 있던 아주머니(이 분이 줄을 서는 걸 봤다), 행색을 보아하니 귀부인인데, 원래 줄이 아니던 줄, 이게 원래 좀 짧다, 하여 가짜 줄에 붙어서 나를 순식간에 앞질러 나가는데, 그냥 넘어갔다. 어쩔 수 있나, 줄을 잘못 선 내 잘못이니까. 가짜 줄도 줄이라는 걸 몰랐던 내 탓이려니 하고 넘어갔는데, 일이 꼬이려고 그랬는지 계산대 앞에서 확 그냥 막혀버렸다. 기계가 고장났는지, 뭐 좌우간 줄이 줄지 않는다. 옆 줄은 계속 줄어드는데, 아주 짜증날 노릇, 그러고 보면 줄이라는 게 참 사소한 것 같으면서도 전혀 사소하지 않다. 그 순간, 옆에서 가짜 줄을 타고 온 이 귀부인 잽싸게 옆줄로 갈아타는데, 순간 나도 갈아탈까,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옆줄이 평상시 속도로 줄어드는데, 좀 늦더라도 갈아탈걸, 이런 생각을 하면서 후회막급. 인간이란 게 원래 이렇게 좀 소심하고도 한심한 존재다. 좌우간 심지어 내 앞에 있던 사람도 옆줄로 갈아타니, 헐, 차라리 그냥 있는게 낫겠다 싶어 멍청히 있었다.

그런데 말이지, 인생이 새옹지마라, 지체되어 있던 내쪽 줄이 순간 '펑'하고 터지면서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데, 와, 역시 사람은 한 우물을 파야해, 이런 생각을 하는 찰나, 갑작스럽게 내 앞을 비집고 들어오는 한 사람, 가짜 줄에 서서 새치기를 했던 이 귀부인이다. 갑자기 혈압이 확 오르는데, 나이도 지긋하고, 행색도 그렇고, 하여 그냥 넘어가려 하다가, 순간 내 혈기가 이성을 제압해 버렸다. 하여 튀어나온 말, 좀 길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줄여서 핵심을 말하자면  "아줌마, 새치기 하지 말아야죠, 뒤에 줄 선 사람들 바보 아니걸랑요." 사실은 바보들이지만, 이 말 아님 다른 무슨 말을 하겠나. 뒤에 길게 줄 서 있던 사람들의 시선에선 "고거 쌤통이다", "거 젊은 놈이 내가 할 말 대신 해주네", 뭐 이런 필이 좀 와닿았던 듯.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참지 못했다는 것. 지금이라면 그리 하지 않을 것 같다만, 좌우간...

그런데 이 아줌마, 수십명의 따가운 시선이 뒤통수에 와닿는 것쯤은 아랑곳하지 않는 내공의 소유자라, "바빠서 그랬는데, 거 젊은 사람이 너무 딱딱하네", 이리 말한다. 이건 (그 당시) 내가 기다리던 반응, 그렇잖아도 혈기방장한 에너지 주체할 바 몰라 술로 중화시키던 시절, 잘됐다 싶어 쌈이 붙었다. 대놓고 응원하진 않아도 무언의 응원군이 줄서 있는 판, 어차피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 아닌가. 하여 아줌마, 이 귀부인 미안하다 말하고 물러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별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이런 생각이 든다. 쪽팔리는 일이지만, 지금은 그리 하지 않는 것도 쪽팔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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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적인 삶

잡글 2011/03/23 00:57

빤한 얘기지만 인간은 두 가지 삶을 동시에 산다. 하나는 세속적인 삶, 말하자면 걍 통속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대로 사는 삶이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질투하고, 뭐 그렇게 사는 삶, 누가 내 뺨 때리면 나도 가서 때리면서 사는 삶, 제 자식 좋은 대학보내려고 학원보내고, 학원비 벌기 위해 엄마가 아르바이트하는 그런 삶, 작품 팔아 생계비에 보태려고 싫지만 잘 팔릴 것 같은 사진 찍는 작가들의 삶, 나처럼 하기 싫은 강의도 하고 쓰기 싫은 원고도 가끔씩 쓰면서 사는 그런 삶, 그러면서 지치고 피곤하면 술이나 퍼마시면서 사는 그런 삶, 에라이 더러워서 못 살겠다 하면서도 꾸역꾸역 살아가는 그런 삶이다.

근데 그렇게만 산다면 어디 사는 맛이 있나, 하여 인간은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을 동시에 산다. 초월적인 삶이라 할 수 있다. 전혀 현실과 다른 삶, 누가 날 미워하면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사는 삶, 남들은 모두 제 자식 영어학원 보내는데 그럴 필요 없다고 고집피우는 삶, 팔리지 않는 작품을 고집스럽게 꾸역꾸역 만들어나가면서 사는 작가들의 삶, 세속적인 가치에 등 돌리고 사는 삶, 보통은 고매하게 산다고들 하는그런 삶이다.
 

예전에 선배들이 나한테 그런 얘길 했었다. "네가 무슨 고고한 학이냐" 그런 얘길 들으면 이 양반들 나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나, 이렇게 생각했다. 사람이 한 가지 삶만을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제아무리 세속적으로 보이는 사람에게도, 제 아무리 고상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두 가지 삶이 함께 있다. 공자님도 자식을 낳았으니 섹스도 한 것이고 먹고 살았으니, 즉 연명했으니 세속적인 삶을 산 것이다. 아주 잡스런 인간의 머리속에도 고상한 삶에 대한 동경이 있지 않겠나. 그러고 보면 인간은 거기서 거기다.

문제는 이 두 가지의 삶이 아주 별개의 것으로 분리될 때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고상한 삶을 사는 사람과 통속적인 삶을 사는 사람의 두 부류로 나눠질 때 인간의 종이 분열된다. 누구나 초월적인 삶에 대한 욕망이 있는 법이다. 아주 천박하고 비열한 사람에게도 그런 욕망은 있다. 반대로 아주 고상하고 고매한 인간에게도 비천하고 저열한 욕망이 있다. 그런데 너는 세속적인 놈이야, 반대로 너는 고상한 놈이야, 이렇게 규정해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인간답지 못하다.

초월적인 삶이라는 게 따지고 보면 좀 우스운 데가 있다. 나는 불경에 대해 잘 모르지만 주워들은 풍월에 따르자면 유마경에서는 세속적인 세계가 병들어 있는데 자기만 초월을 향하여 도를 닦는다는 것이 올바른 길이 아니라고 들었다. 초월적으로 살고 싶은 욕망은 누구한테나 있는 법이다. 하여 그걸 버린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면 세속적으로 사는 건 쉬운가.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세속적인 삶을 살수록 초월적 삶에 대한 욕망도 커가는 법이다. 그렇게 현실에 충실하여 살아온 사람들이 나중에 느끼는 회한이 얼마나 큰가. 물론 세속적인 삶에 충실하지 않았던 이들에게도 똑같은 회한이 있다. 하여 이 둘의 간격을 좁히면서 사는 것이 후회를 줄이는 삶이 될텐데, 그게 어디 쉬운가. 속세에 있으면 출가하고 싶고, 출가하면 환속하고 싶고, 뭐 그런게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자기한테 없는 것만을 원하고(있는 건 원할 필요가 없을 터이므로), 자기가 있는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만 가고싶어 한다.(이미 그 곳에 있는데 다시 갈 이유가, 아니 다시 갈 수가 없으므로) 결국 인간은 초월적인 삶을 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세속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초월적인 삶을 꿈꿀 수조차 없지 않은가. 하여 세속적인 삶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초월적인 삶도 가능할 터이므로. 반대로 초월적인 삶을 살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세속적인 삶을 비틀어 바꿀 수 있을 터이므로. 그런 점에서 김훈 선생의 '밥' 결정론은 좀 래디칼한 구석이 있다. 술김에 얘기하자면 너무 세속적이고, 또 가부장적이기도 하다. '먹여 살려야 한다', 이게 어떻게 보면 고매한 얘기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통속적인 얘기 아닌가. 하긴 고매한 삶에 없는 것이 이 '세속적인' 요소이므로 이상할 것도 없다. 좌우간  한 가지 삶에만 집착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그래서 내 눈에는 반쪽짜리 삶으로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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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어렵다

잡글 2011/02/15 03:26
술을 먹거나 음악을 들으면 사람은 센티멘탈해진다. 혼자 있을 때 얘기다. 반대로 여럿이 함께 마시면 수다를 떨고 여럿이 함께 들으면 격정에 휩싸인다. 그럼 혼자서 음악 들으면서 술 마시면? 이건 보통 위험하다고들 말한다. 알콜중독의 초기 증상이라고도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뭐 별로 위험한 것도 아니다. 좌우간 요점을 말하자면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을 위험 속으로 몰고갈 필요가 있다. 좀 더 정확한 표현을 쓰자면 한계 너머로 자신을 밀쳐내야만 한다. 자기 자신을 문제삼지 않고서 어찌 타인을, 세계를 문제삼을 수 있겠나. 한계의 문제를 가장 먼저 철학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은 사람은 데카르트인데, 그는 광기와 착란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른바 코지토를 찾아나섰다. 미친다 한들 무슨 대수란 말인가. 하지만 정작 광기는 원해서 찾아오는 게 아니라 저절로, 소리 없이, 나도 모르게 찾아오는 법이다. 그걸 원한다면 이미 미친 놈일 테니까. 사유의 가치는 지식의 양이나 논리의 엄밀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힘에서 온다. 사유의 한계는 무언가. 바로 사유할 수 없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사유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하는 것이 사유의 진정한 힘이다. 사람도 그렇지 않은가. 사람은 대체로 거기서 거기다.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사람, 그가 진짜 사람 아닌가. 그래서 옛 어른들이 입버릇처럼 사람되기가 그토록 어렵다고 말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많이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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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책

잡글 2011/02/07 23:15
오래 전 조셉 니덤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을 사려고 알라딘에 들어갔는데 절판되어 못사고 있다가 오늘 보니 중고책이 나와있어 옳다꾸나 싶어 찜을 하였다. 그런데 가격을 보니 헉, 원래 17,000원짜리 책이 39,000원에 나와있다. 내가 책에 미친 놈도 아니고 과학사 전공도 아닌데 이런 덤터기를 쓸 까닭이 없어 포기했다. 도서관에 가서 보면 될 것을 뭐하러...

이따금 꼭 보고 싶은 책이 있어 찾아보면 절판된 경우가 많아 아쉽다. 재출간하면 좋으련만. 서양에서는 이런 고전들은 문고판으로 값싸게, 대량으로 찍어내는데, 우리도 그런 출판문화가 있으면 좋겠다. 하여 중고책 가격이 어느 정도인가 궁금하여 법정 스님의 <무소유> 중고상품을 찾아봤다. 푼돈을 노린 벼라별 장사치들이 많다. 가격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인데 대략 2004년판은 5만원에서 8만원, 99년판은 10만원에서 15만원 정도인 듯. 1976년 초판본은 150만원에도 나와있다. 우리 집에도 한 권 있다. 나야 이런 종류의 책을 사는 인간이 아니라 생각지도 않았는데, 아내가 젊었을 때 선물받았던 책이라 일러준다. 며칠 전 책 한권 찾을 일이 있어 서가를 기웃거리다가 우연히 발견했는데, 1997년 재판본으로 원래 가격은 이천원이다. 동일 년도에 발간된 중고상품 가격을 보니 이십만원에 나와있다. 보지도 않는 책, 아내 몰래 확 팔아버릴까 싶다. 
Posted by paixa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