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테크놀로지는 등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 시대의 문화지형을 빠른 속도로 변화시켜 왔다. 이 테크놀로지에 기초한 문화는 이제 기계 마니아들만이 향유하는 특수한 문화가 아니라 우리 시대 전체의 문화로 확산되었다. 바야흐로 디지털 문화의 시대가 열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인터넷과 스마트폰, 아이패드 등 디지털 문화를 이끌어 나가는 하드, 소프트 웨어의 영역에서 사진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사진 없는 디지털 문화란 상상하기 어렵다.

여기에는 사진이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통해 아주 쉽게 생산, 유통될 수 있다는 점이 주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누구나 디지털 카메라로 원하는 사진을 찍어 파일 상태로 보관할 수 있으며, 마음에 드는 사진을 타인과 주고받을 수 있다. 인터넷의 가상공간에 그 사진을 올려 대량으로 유통시킬 수도 있으며, 타인의 사진을 함께 공유할 수도 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클릭 한번으로 사진을 제거해 버릴 수도 있고, 마음이 바뀌면 다시 환생시켜낼 수도 있다. 손오공의 마법처럼 같은 사진을 대번에 여러 장 복제해낼 수도 있고, 크기를 마음대로 키우거나 줄일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원본(데이터로 존재하는)의 품질은 전혀 훼손되지 않는다. 예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다.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사진의 생산과 유통에 미친 영향은 다양한 각도에서 검토해 볼 사안이지만, 우선 복제의 측면에서 생겨난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벤야민이 사진 복제가 가져온 문화사적 변화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과 관련하여 다시금 우리 시대의 복제문화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지 않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디지털 복제는 기존의 아날로그적 사진 복제와 질적으로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차이는 일상에서부터 예술작품의 생산과 수용, 특히 예술로서의 사진에 이르기까지 주목할 만한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먼저 아날로그 시대의 사진 복제가 어떤 형태로 이루어져 왔는지 살펴보자. 최초의 복제 시스템을 고안했던 이는 영국인 탈보트이다. 탈보트보다 먼저 사진술 발명자라는 영예로운 지위를 얻었던 이는 니에프스의 연구를 발전시킨 다게르였지만, 그가 고안했던 다게레오타입은 복제가 불가능했다. 반면 탈보트의 칼로타입은 종이원판에서 여러 장의 사진인화를 복제해 낼 수 있어 오늘날의 사진 복제시스템을 처음 실현시킨 방법이었다. 그런데 칼로타입은 불투명환 종이원판을 사용하는 까닭에 신속하게 복제를 해내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복제를 계속해낼 때마다 종이원판이 훼손되어 복제할 수 있는 양에도 한계가 있었다. 칼로타입의 복제력이 비약적으로 증대된 것은 두 가지의 기술적인 개량 덕분에 가능했다. 공식적으로는 1851년에 개발된 밀랍지법과 알부민법이다. 전자는 종이원판에 밀랍을 입혀 종이의 공기구멍을 막아 이미지의 선명도를 높이고 원판의 표면에 견고성을 부여했다. 후자는 감광도를 높여 한 장의 원판에서 하루 500장 정도의 인화가 가능하도록 했다. 알부민 인화는 초기의 칼로타입이 지녔던 복제력에 비하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이지만 이를 두고 벤야민이 언급한 전시가치가 대번에 실현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전히 복제의 양에는 제약이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무한복제가 가능해진 것은 사진인쇄, 특히 망판인쇄술이 보급되면서부터이다. 이전에도 사진인쇄는 가능했지만 활자와 함께 인쇄할 수 없어 실용화에 이르지는 못했다. 반면 활자와 사진을 동일지면에 인쇄할 수 있는 망판인쇄가 등장하면서 사진은 세계를 뒤덮게 되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사진을 볼 수 있는 세상, 역으로 말하자면 어디를 가더라도 사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세상, 그야말로 사진의 편재(遍在)가 시작된 것이다. 벤야민이 언급한 기술복제 시대는 바로 이처럼 사진의 무한복제와 더불어 열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무한복제에도 한계는 있다. 우선 사진의 생산자, 그리고 그 사진을 복제하는 주체가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감광도가 높은 건판필름과 자동카메라는 사진의 생산자 층을 잠재적으로 광범위하게 넓혀놓았지만 복제를 통해 만나게 되는 사진의 생산자는 여전히 특별한소수였다. 이는 복제의 주체가 일반 대중이 아니라 매체였기 때문이다. 즉 한 장의 사진은 그 사진을 활용하고자 하는 매체의 방침과 부합할 때만 복제될 수 있었다. 요컨대 복제 가치가 있는 사진을 찍은 자만이 사진의 진정한 생산자일 수 있었다. 그렇지 않은 경우 사진은 사진가의 손을 떠날 수도, 복제될 수도 없으며, 결국 그 사진가는 사진의 생산자일 수 없었다. 둘째, 복제된 사진 이미지의 수용자는 단지 수용자일 뿐, 그 사진을 다시 복제해낼 수 없었다. 물론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사진을 카메라로 다시 찍어 복제해낼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을 복제라고 하기는 어렵다. 복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과정 자체가 곧 현실의 피사체를 촬영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복제 이미지의 품질이 원본보다 못하다면 복제 행위는 훨씬 쉽고 간편해야 한다. 그래야 복제의 가치가 생긴다. 하지만 이 경우 촬영 행위와 복제 행위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셋째, 촬영을 통해 얻어낸 복제 이미지는 원래의 원본에 비해 품질이 낮다. 이 차이가 아무리 미세하다 할지라도 물리적인 차이는 반드시 발생한다. 아날로그 방식이기 때문이다. 즉 아날로그는 유사를 속성으로 삼고 있는 탓에 반드시 원본과 다르다. 복제가 거듭될 때마다 품질은 낮아져 원본이 갖고 있는 정보는 상당 부분 훼손되는 것이다.

한편 디지털 복제는 아날로그 방식의 복제가 갖고 있는 이런 단점을 대부분 극복할 수 있다. 먼저 품질의 문제. 아날로그 복제에는 원본이 있다. 복제를 가능케 하는 무엇, 즉 복제가 시작되는 지점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다. 복제물과 원본의 차이가 거의 없더라도 복제의 대상은 있는 것이다. 사진 복제의 경우 필름이 원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디지털 복제의 경우는 원본과 복제본의 물리적 차이 없이 무한 복제가 이루어진다. 때로 복제본이 원본이 되기도 한다. 이는 디지털 사진의 원본이 이미지가 아니라 데이터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미지는 유사를 토대로 하지만 데이터는 숫자를 근간으로 삼는다. 숫자는 유사를 배제하므로 조금만 달라져도 다른 데이터, 즉 다른 이미지가 된다. 따라서 데이터 상태로 복제되는 디지털 이미지는 원본과 복제의 구분이 없다. 결국 디지털 복제의 경우 모든 복제본의 품질은 동일하다. 둘째, 디지털 사진의 생산자, 그리고 그 사진을 복제하는 주체는 특권을 부여받은 자들이 아니다. 이 문제는 결국 이미지의 유통과 긴밀히 연계되어있다. 아날로그의 경우 복제 가치가 있는 사진은 한정되어 있으며, 복제의 주체 또한 그렇다. 사진 복제에는 일정한 시간과 경비가 소요되므로 복제할 사진은 소수로 한정된다. 즉 복제의 목적이 분명할 경우에만 복제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디지털 복제의 경우는 시간도, 경비도 필요치 않다. 또한 거기에는 특별한 목적이 없다. 디지털 복제는 오히려 유희적이다. 누구나 특별한 목적 없이 사진 복제를 행하는 것이다. 이제 복제는 정치적, 사회적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유희를 위한 것이 되었다. 복제 본을 만들었다가 언제라도 파기할 수 있고, 다시 또 복제해 낼 수 있는 것이 오늘날의 복제문화이다. 셋째, 디지털 복제는 모든 정보를 사진이미지로 환원시켜낸다. 원본이 사진인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그림이나 만화, 심지어는 문자 텍스트마저도 사진 복제라는 매개를 거쳐야만 정보가 된다. 즉 우리가 디지털 복제를 통해 접하는 모든 정보는 사진을 기본 단위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플루서가 선형문자라 불렀던 것마저도 기술 이미지로 변환시켜 정보로 받아들인다. 그야말로 디지털 복제가 창궐하는 시대이다.

이런 조건에서 예술작품, 특히 사진은 다시 한 번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변화는 매우 복잡하게, 그리고 불명료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우선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문제들 몇 가지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우선 처음으로 사진 복제의 문제를 언급한 벤야민을 따라 디지털 복제 시대의 전시가치에 대해 살펴보자. 이 문제는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첫째, ‘사진작품이 전시장에서 관객과 만나는 경우와 둘째, 이 작품이 복제 이미지로 가상공간에서 유통되는 경우이다. 첫 번째 경우 사진작품은 여전히 전시가치보다는 제의가치에 묶여있다. 사실 전시장에 입성하는 사진작품은 대부분 디지털 방식으로 출력되어 벽에 걸린다. 그런 점에서 이 사진들은 첨단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단지 인화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결국 아날로그 방식과 근본적으로 유사하다. 여전히 전시장이라는 공간의 특별한 의미에 집착하고 있으며, 결국 전시가치를 위한 공간이 제의가치에 매달려 있다 하겠다. 왜냐하면 미술관이나 상업갤러리에 전시된 사진은 관람자에게 복제품이 주지 못하는 특별한 경험을 제공해야 하며, 그 경험은 바로 그 장소에서만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설혹 그 작품전시가치가 있더라도 전시장을 찾는 이들의 수는 제한적이어서 무한복제를 통해 증폭하는 이미지들의 전시가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미술관을 통해 유통되는 사진작품들이 전시가치를 극대화시키려면 전시장을 버리고 복제이미지에 의존하여 가상공간을 배회해야만 하는가? 이 경우 사이버 갤러리의 가능성이 아직 남아있다.

두 번째의 경우, 복제된 사진작품은 무수히 많은 불특정 다수의 관람자와 만날 수 있다. 그야말로 전시가치가 극대화되는 셈이다. 그런데 이 복제 이미지들은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진짜 작품에 비하면 품질이 훨씬 낮다. 따라서 심미적 체험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 복제 이미지들이 제공하는 경험의 두께는 매우 얇은 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품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대개의 관람자들은 전시장 벽에 걸린 사진작품사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로 받아들인다. ‘사물이 제공하는 미세한 결을 감각적으로 더듬어나가면서 풍요로운 체험으로 확장시키기보다는 무엇이 찍혔는지, 사진가는 그것을 왜 찍었는지, 그 이미지는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더 큰 관심을 보인다는 말이다. 이 경우 사진의 물리적 품질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인터넷의 가상공간에서 볼 수 있는 복제이미지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많은 사진작품들이 저용량 디지털 데이터로 복제되어 가상공간을 둥둥 떠다니고 있다. 전시홍보용으로 신문, 잡지, 인터넷 매체에 제공한 데이터나 그 밖의 목적으로 만들어낸 디지털 이미지가 불특정 다수의 관람자들 사이에서 무한 복제되는 것이다. 이런 복제에는 기원도 없고, 원본도 없으며, 말하자면 복제본도 없다. 서로가 서로를 복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제의 목적 또한 없다. 단지 복제를 위한 복제, 혹은 유희로서의 복제일 뿐이다. ‘전시가치유희가치로 옮겨간다 하겠다.

디지털 복제가 야기한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는 복제의 원본이 되는 사진의 물질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날로그 시대의 사진가들은 복제 이미지(오리지널 프린트라 불리는)를 필름이라는 물질로부터 얻어냈다. 그 물질의 권위는 확고부동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 없이 오리지널 프린트라는 또 다른 물질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 후자로서의 물질(복제품)이 원본으로서의 물질(필름)을 압도한다는 것이다. 원본으로서의 물질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서 자산가치가 높은 복제품으로서의 물질을 얻어낼 수 있는 한에서였다. 그런데 이제 이 원본으로서의 물질은 디지털 데이터에 자리를 넘겨주고 있다. 사진가들이 오리지널 프린트라는 복제품을 만들어낼 때의 원본은 디지털 데이터이다. 디지털 팩을 사용하여 애초부터 데이터 상태로 시작하거나, 필름으로 촬영하여 그것을 다시 디지털 스캔하여 데이터로 변환시키기 때문이다. 즉 디지털로 출력한 모든 사진들의 원본은 물질성이 없는 디지털 데이터이다.

위에서 살펴본 몇 가지 현상들은 비록 징후에 불과하지만 예술작품의 생산과 유통, 보존 등 다양한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이 변화의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 것인지는 성급히 예단할 수 없다. 다만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진화가 무섭게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이 일상에서부터 대중문화, 예술의 지형과 생태계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 또한 그렇다. 디지털 복제는 아날로그 사진 복제나 기술 이미지의 등장이 야기한 변화 못지않게 큰 지각변동을 가져 올수도 있다. 어쩌면 그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거나 진행 중인지도 모르겠다.

계간 황해문화 2011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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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의 유명 영화배우 리처드 기어가 방한하여 사진전을 열었다. 이번 방문은 그가 설립한 기어재단(The Gere Foundation)이 추진하고 있는 사회운동의 일환이라는 후문이다.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폐해와 인권 침해 사례를 고발하고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한 공익적 활동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영화배우로 활동하면서 번 돈을 인류에 환원한다는 숭고한 목적이 있기에 방법을 떠나 일단은 반길 일이다. 그런데 리처드 기어의 이름 앞에 따라붙는 수식어 ‘유명 사진작가’라는 말이 왠지 걸린다. 그 말이 언론에서 별 의미 없이 갖다 붙인 단순한 수식어라 하더라도 말이다. 이번 전시의 목적에 공감하여 사진을 출품해 준 또 다른 ‘유명 사진작가’들도 상당수이다. 하지만 그들의 유명세와 리처드 기어의 유명세는 아주 다른 차원의 것이다.

국내의 명사(名士)들 중에서도 사진전을 열고, 작품집을 발간하여 ‘유명 사진작가’ 대접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들 중에는 유명 가수나 배우도 있고, 기업 총수도 있으며, 사회적 명망가나 각계 유력 인사도 있다.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전문가들도 있고, 평생 일만 하다 이제 ‘예술’에 눈 떠 다른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자 하는 교양인들도 있다. 심지어는 현직 대통령마저 은퇴 후에 ‘사진작가’가 되어 활동해보고 싶다는 바람을 사석에서 피력한 적도 있다고 하니 그야말로 사진작가는 명사들의 동경이라 하겠다. ‘사진작가’라는 직업 아닌 직업이 그들에게는 매력적으로 비치는 모양이다.

그들이 ‘사진작가’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이나 관념, ‘작가’ 활동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바는 각기 다를 것이다. 리처드 기어처럼 공익적 목적을 위해 사진을 활용하고자 하는 이도 있을 테고, 소박하게 취미생활이나 여가활동을 위해 사진을 찍고자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좀 더 거창한 꿈을 갖고 ‘예술가’로 성공하고 싶은 이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편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사진작가’에 대한 저마다의 환상을 갖고 있다. ‘사진작가’를 동경하는 그들의 욕망이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인간은 누구나 꿈을 꿀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꿈을 펼쳐나가려 할 때는 신중히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우선 왜 ‘사진작가’를 동경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시인이나 소설가도 있고 화가도 있는데, 왜 굳이 사진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가 말이다. 문인이나 화가는 부르디외식으로 표현하자면 장(場)의 위계가 높아 사진작가보다는 사회적으로 선망의 대상이 된다. 실제로 등단을 하지 않았다 뿐이지 직접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쓰는 아마추어 문인들도 상당수에 이르며, 전시회를 하지 않아도 본래 재능이 뛰어나 그림을 잘 그려 선망의 대상이 되는 이들도 많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얼마 전 유명 래퍼가 펴낸 소설이 베스트셀러 목록에까지 올라가 일반 독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적도 있고, 유명 연예인들 중에는 정기적으로 그림 전람회를 개최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글을 잘 쓰거나 그림을 잘 그리기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오랜 훈련이 필요하고 게다가 재능까지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사진을 잘 찍기란 글이나 그림에 비해 한결 수월하다. 물론 시작 단계에서만 그렇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문인이나 화가가 되겠다는 꿈보다는 훨씬 현실적이다.

사진이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만 하더라도 사진술을 배우기가 쉽지 않았다. 필름을 직접 만들어 써야 했고, 카메라를 다루기도 어려웠으며, 필름에서 사진을 인화해 내는 공정도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대량생산하는 건판 필름이 등장하고 나서야 촬영자가 직접 필름을 제조해야 하는 번거로움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또한 셔터만 누르면 나머지는 알아서 해준다는 코닥 카메라의 광고 문구는 누구나 사진작가가 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음을 알려주는 신호탄이었다. 실제로 코닥 카메라가 시판되는 1880년대 후반 이후에는 광범위한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사진작가’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후에도 사진의 기술적 진보는 계속되어 이런 경향은 가속화되었다. 디지털 기술의 시대가 도래 하면서 사진의 생산과 소비, 유통은 은염사진의 시대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간편해졌다. 이런 시대를 살면서 한번쯤 ‘사진작가’가 되기를 꿈꾸어보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이상할 정도이다. 그런 점에서 명사들의 희망사항 또한 정당한 바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바람의 귀결점이 어디냐에 있다.

사실 리처드 기어가 찍은 사진이나 그 전시에 작품을 출품해 준 유명 사진가들의 사진 사이에 시각적으로 큰 차이는 없다. ‘결정적 순간’의 신화를 만들어 낸 까르띠에-브레송의 사진을 운 좋게 누구라도 비슷하게 찍어낼 수 있으며, 현대미술 시장에서 고가에 팔리는 사진과 시각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 사진을 이제 막 ‘사진작가’가 되고 싶어 하는 일반인도 조금만 노력하여 모방하면 만들어낼 수 있다. 저명한 사진 콘테스트에서 입상한 ‘작품’과 무수히 많은 사진 동호회 게시판에 올라오는 사진들 사이에는 기실 큰 차이가 없다. 국내 유명작가가 찍은 사진과 무명의 작가지망생이 찍은 사진이 질적으로 아주 다른 것도 아니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유명한 작품사진을 보고 누구라도 ‘나도 저 정도는 찍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해서 하등 이상할 것 없다. 따라서 ‘나도 사진작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아주 자연스럽다 하겠다.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예컨대 누구나 백화점에서 물건을 사다가 서명을 하여 전시장에 내놓을 수 있다. 뒤샹이 그랬듯이 말이다. 어쩌면 뒤샹이 레디메이드로 제시한 병 걸이나 자전거바퀴, 소변기보다 훨씬 더 그럴듯한 물건을 뒤샹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 전시장에 갖다놓을 수도 있다.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가 구겐하임 미술관에 어느 날 갑자기 백화점에서 구입한 물건을 갖다놓고 레디메이드 작업을 했다고 우긴다면 각종 언론에서 가만히 있겠는가 말이다. 그 경우 그들은 예술가인가? 물론 그들이 예술가가 아니라고 고집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들이 예술가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 또한 없다. 이럴 경우 단토라면 그들이 미술관에 갖다놓은 물건이 예술의 장(場) 속에서 무언가를 발언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들의 행위가 바로 그 장 속에서 의미를 부여받는다면 가치 있는 예술작품이라고 말할 것이다. 추정컨대 이 유명 인사들의 행위는 일거수일투족 언론의 주목을 끄는 까닭에 그들이 제시한 레디메이드 작업은 예술계에서조차도 비상한 관심을 보일 것임이 분명하다. 여기에서는 당연히 미술관이라는 예술제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미술관에서 그들의 작업을 수용했다면 이미 그들은 공인된 예술가라 할 수 있다. 이런 일이 벌어질 리는 없겠지만, 비슷한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명사(名士)들의 사회활동은 주목받게 마련이다. 그들의 일상이 관심거리인데 전시회를 열거나 작품집을 출간하면 오죽하겠는가. 한 마디로 ‘뉴스거리’가 된다. 십 수 년씩 작가활동을 해도 언론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작가가 부지기수인데, ‘데뷔전’이 ‘뉴스’가 된다면 이는 불공평한 것이다. 물론 언론만 탓할 바는 아니다. 어쩌면 언론의 이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언론의 속성이니까. 대중들의 반응 또한 나무랄 것만은 아니다. 그것이 대중의 속성이므로. 오히려 문제는 명사들의 사진 활동에 대한 전문가 집단의 과민반응이다. 언론이 그리하는 것은 뉴스가치 때문이라고 이해하면 그 뿐이지만 전문가 집단이 부화뇌동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사진갤러리나, 전문 잡지, 작가, 평론가 등 사진문화를 가꾸어 나가는 이들이 냉정한 평가를 내릴 필요가 있다.

누구나 알아보는 명사가 아니더라도 사회 각 분야 유력인사들의 사진 활동 역시 눈길을 끌기는 마찬가지이다. 재력이 있거나 언론, 출판계에 영향력 있는 유력 인사들이 사진전을 열거나 작품집을 출간하면 상대적으로 주목받을 여지가 크다. 그리고 그렇게 전시를 몇 번 하고 나면 ‘사진작가’ 대접을 받는다. 이는 일반 사진애호가들 사이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취미, 여가 활동으로 시작했다가 연수가 쌓이고, 자신감이 붙고, 주변에서 칭찬도 받고, 간혹 공모전에 당선이라도 되면 그 때부터 ‘사진작가’로 통하는 것이다. ‘사진작가’라는 수식어가 그리 명예로운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호칭을 원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지적해야 할 점은 사진애호가, 즉 아마추어 작가들이 사진에 대해 취하는 태도이다. 문화 민주주의라는 이념이 일종의 공리(公利)처럼 인식되는 한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 ‘사진작가’가 될 수 있는 권리를 누구나 갖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사진애호가들에게 자신의 직업을 버리고 사진 작업에만 헌신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대개는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즉 그들은 ‘사진작가’라는 지위가 덤으로 따라올 때만 수용하려 한다. 물질적 안락함을 포기하면서까지 ‘작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작업에만 몰두하는 작가들에게도 물질적 풍요에 대한 세속적인 욕망이 당연히 있다. 그들 역시 때로는 ‘작가’로서의 궁핍한 삶을 버리고 안정된 노동의 세계 속으로 편입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자기 직업을 버리면서까지 ‘사진작가’가 되기를 원치 않는 아마추어 사진가들처럼 그들 역시 ‘작가’이기를 그만두고 ‘직업인’이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사진문화가 진행되어 온 역사를 보면 각 시기마다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역할이 있었다. 그들은 단지 향유의 권리만을 앞세웠던 단순한 문화 소비자가 아니라 진정으로 그 문화를 아끼고 이해했던 적극적인 문화 생산자이기도 했다. 사진술이 한국에 도입된 초창기부터 현재까지 아마추어 사진가들은 한편으로는 방대한 문화 소비자층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사진언어의 생산자로서 이중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다. 예를 들면 1920-30년대의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있다. 한국의 초창기 사진문화는 사진관에서 영업활동을 하던 사진사들이 주도해 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 시기의 직업사진사들은 사진을 주로 도구적으로 이용한 측면이 있다. 이런 관행과 결별하고 이른바 ‘예술사진’을 추구해 나갔던 이들 중에는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고, 그들의 예술적 성취도는 매우 높았다.

등단이라는 제도가 없는 한국 사진문화의 관행에서 ‘사진작가’로 인정받는 길은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존속해 왔던 공모전에서 입상하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자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사진작가’라는 모호한 명칭 또한 국내 최대 규모의 공모전을 주최하는 <한국사진작가협회>에서 나왔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오늘날 이 제도는 점차 실효성을 상실해가고 있다. 공모전의 권위는 계속해서 실추되어가고 있으며, 작가협회 회원 수는 감소추세에 있다. 공모전 입상 또한 사진가로 활동하기에 내세울만한 스펙이 되지 못한다. 사진작가협회 주최의 공모전 외에도 수많은 다른 공모전이 있지만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현실에서 ‘사진작가’를 동경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

그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사진작가상(像)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사회적으로 널리 인정받으면서 고상해 보이는 예술가상을 그리거나, 품격을 지키면서 작품도 잘 판매하는 유명 예술가상을 떠올릴 것이다. 전시회장에서 박수갈채도 받고, 대중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는 성공한 작가상, 그것이 모두가 원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채 궁핍을 감내하며 묵묵히 자기 세계를 완성해 나가는 작가들이 태반이다. 그들은 오직 자기 자신과 싸우면서 때로는 인류와, 때로는 세계와, 때로는 문명 전체와 한바탕 도박을 벌이고 있다. 그들의 노동에 어떤 보상이 따라올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들 역시 세속적으로 성공한 작가상을 그리고 있을 테지만 초초함을 지워버릴 만큼 ‘사진작가’라는 지위가 탄탄한 것은 아니다. ‘사진작가’를 동경하는 이들의 머릿속에 이런 작가상이 있는지 궁금하다. 결국 그들은 장밋빛 미래보다 어두운 현실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이는 현실적인 전략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윤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황해문화 2011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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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브 르 그레

사진 2011/06/20 01:00

귀스타브 르 그레(Gustav Le Gray)의 사진이 917,000 유로에 팔린 모양이다. 1유로를 1,600원으로 계산하면 대략 15억 가까이 되니, 잘 나가는 현대작가보다 훨씬 고가다. 크기는 31x 40cm에 알부민 프린트, 총 4개의 에디션 중 하나다. 해당 사진은 <르 아브르 항을 떠나는 선단>으로 1856년이나 57년경에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19세기에 생산된 사진으로는 최고가에 팔렸다. 대서양에 정박한 나폴레옹 선단을 촬영한 10여 점의 사진 중 하나인데, 세트 해안을 촬영한 다른 사진도 300,000유로 이상에 팔렸다 한다.

 


귀스타브 르 그레는 사실 아주 중요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연구가 많이 되어 있지 않다. 1840년대 말부터 칼로타입을 개량한 다른 사진 프로세스를 연구했으며, 1850년 초에는 건성밀랍지법을 발표하여 주변 사진가들에게 퍼뜨린 사람이다. 다게르나 탈보트처럼 특허권을 주장하지 않고, 걍 주변 동료들에게 가르쳐 주었던 사람이다. 원래 화가였지만 사진술 연구에 매진하여 1840-50년대에는 프랑스에서 가장 사진술에 정통해 있었다. 초기의 여행사진가인 막심 뒤 캉도 르 그레에게 사진을 배워 이집트에 갔고, 나다르도 그에게 사진을 배워 스튜디오를 열었다. ‘사적위원회’ 소속으로 프랑스 전역의 유물, 유적을 기록했던 샤를 네그르나 앙리 르 세크와 같은 사진가들도 르 그레가 개발한 건성밀랍지법을 배워 사용했다. 이번에 팔린 르 그레의 사진은 인상파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는데, 원판은 콜로디온 습판을 사용한 것으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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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서점의 <취미, 레저> 코너에 가면 여행사진 부스가 따로 있고, 그 앞은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출판시장의 불황 속에서도 여행사진 관련 서적은 꾸준히 효자 노릇을 해왔다는 얘기도 들린다. 또한 인터넷에서 ‘여행사진’을 검색하면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올려놓은 무수한 사진이 카페와 블로그에 올라와 있다. 나아가 여행사진 전문가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이며, 장래 희망으로 여행사진가를 꿈꾸는 젊은이들도 많다. 실제로 여행사진을 전문으로 하는 ‘작가’들은 두터운 층의 ‘팬’을 거느리고 있어 유명 작가 못지않은 명성을 누리는 모양이다. 바야흐로 여행사진의 전성시대가 펼쳐지고 있다고 할 만하다.

왜 여행사진에 열광하는가?

이런 현상이 생겨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테지만 우선 간추려서 두 가지 조건을 언급하기로 하자. 첫째는 당연히 여행 문화의 확산이다. 1989년부터 해외여행이 자유화되면서 해외여행자 수는 급격히 증가했고,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해외여행 바람은 식기는커녕 더욱 거세지는 추세다. 국내여행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가족 단위, 모임 단위의 단체여행을 비롯하여 개별 여행자들의 수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늘었다. 여행은 이제 빼놓을 수 없는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것이 노동에 지친 생활인들의 휴식을 위한 것이든, 좀 더 여유로운 삶을 만끽하고자 하는 유희 본능에서 나온 것이든, 혹은 미지의 세계를 알고 싶어 하는 욕망에서 나온 것이든 우리의 삶에서 여행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커져가고 있다. 여행을 하지 않고도 아무 탈 없이, 아무 불평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고려하자면 여행이 삶에 반드시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여행은 필요의 산물이 아니라 욕망의 산물이다. 여행이 사치이던 시대가 분명히 있었다. 먹고살기 바빴던 시절에 여행은 감히 꿈조차 꾸기 어려웠다. 물론 그 시절에도 자유롭게 여행 다닐 수 있는 이들이 있었고, 지금도 여행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어쨌든 여행은 보편화되었다. 이제 개미처럼 평생 일만 하면서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두 번째 조건은 누구나 사진을 찍고, 또 유통시킬 수 있는 물적 조건이 마련되었다는 점이다. 디지털 카메라가 등장하기 전에도 사진을 찍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현상, 인화를 대신 해주는 전문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질의 사진을 얻을 수 있는 고성능 카메라는 고가였고, 값싼 자동카메라는 성능이 좋지 않아 사진의 질이 낮았다. 여행 가면서 고성능 카메라를 메고 가는 사람은 좀처럼 보기 어려웠으며 휴대용 자동카메라는 단지 기념촬영용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 카메라의 성능은 상향평준화되었다. 전지 크기(20x24인치)로 인화해도 별 무리가 없을 정도의 고성능 카메라가 스마트폰에까지 장착된 것이다. DSLR카메라는 성능 면에서나 습득의 용이함에서나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진화했다. 조금 과장시켜 말하자면 가정에서 사용하는 전자제품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다. 매뉴얼만 읽어 보면 누구라도 조작이 가능한 기계가 된 셈이다. 나아가 일반 디지털 자동카메라는 카메라의 원리를 전혀 모르는 어린아이라도 사용할 수 있을 만큼 편리하니 그야말로 누구나 사진가가 될 수 있는 시대이다. 사진의 유통이라는 측면에서도 상황은 크게 변했다. 자신이 촬영한 사진을 인터넷에 올려 지식정보를 제공할 수 있고, 반대로 타인의 사진을 통해 폭넓은 정보를 받아들일 수도 있다. 가치의 교환이 자유로워진 셈이다. 심지어는 초등학생들도 카페와 블로그에 자신이 찍은 사진을 올려 친구들과 공유할 수 있으니 사진의 유통은 전 방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조건에서 여행사진이 세인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온라인상에서 주목을 받으면 출판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아 여행사진은 온라인상에서 뿐만 아니라 인쇄매체를 통해서도 각광을 받는다. 이러한 현상은 분명 반길 일이다. 우선 개인사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여행은 개인에게 특별한 가치가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를 기억할 수 있도록 사진으로 남겨놓는 것은 그래서 의미 있다. 또한 교양, 학습의 측면에서도 여행사진은 긍정적인 가치가 있다.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대해 미리 알려주기 때문이다. 낯선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을 함께 갖고 있는 이들에게 타인이 제공하는 여행사진은 기대 이상의 학습효과가 있다. 사진술이 발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여행사진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급기야 하나의 장르를 형성할 만큼 확산되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물론 여행사진 생산의 저변에는 제국주의 지배의 전초단계에서 필요한 지식 구축의 논리가 깔려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여행사진이 생산되는 현실적인 양상을 보면 몇 가지 부정성이 눈에 띈다. 우선 제한적으로 두 가지의 문제에 대해서만 언급하기로 하자. 이를 구분하여 첫째는 신성의 박탈, 둘째는 경험의 축소라 규정하겠다.

변질된 세계

신성의 박탈은 통속화의 다른 이름이다. 여행지는 보통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곳, 문명사적으로 가치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비록 관광지로 변해버렸을지라도 거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성이 있다. 지금은 관광객들로 우글거림에도 불구하고 그 곳은 본래 ‘특별한’ 장소였다. 따라서 그 곳이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장소라면 존중의 자세가 필요하다. 물론 그 ‘특별한’ 장소에 내가 있었다는 사실 또한 특별한 일임에 틀림없다. 여행자들이 그 곳에서 사진 찍기에 열중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그 행위에는 탐욕이 앞서 있다. 하여 한 때는 사원이었던 곳이 일개 피사체로 전락해 버리는 모습은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곳이 어떤 곳이었는지조차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 단지 사진만 찍는 경우도 허다하다. 서양의 성당건물이나 성, 동양의 사원이나 궁궐 등에는 매우 복잡한 역사적 사연들이 얽혀있지만 대개는 건축물의 외면을 사진에 담아내기에 급급한 것이다. 때로 여행지에서 보내는 시간의 대부분이 사진 촬영에만 집중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여행이 산 경험을 하러 가는 것인지 죽은 사진을 찍기 위해 가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인 것이다.

신성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는 여행사진의 초기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최초의 여행사진가로 알려져 있는 프랑스인 막심 뒤 캉(Maxime du Camp)은 1849년 정부의 기금을 받아 이집트 여행을 했다. 이집트의 유적을 촬영하여 교육 자료로 활용하겠다는 기획이 받아들여져 프랑스 교육부의 재정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그는 200여점의 이집트 사진을 남겼으며, 그 중 일부를 모아 발행한 사진첩은 여행사진의 성공적인 사례로 꼽힌다. 그런데 그가 람세스2세의 신전을 촬영한 사진에는 누비아인 조수가 람세스2세의 거상 위에 올라가 있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신전의 규모를 보여주기 위해 신전 위에 사람을 세워놓고 촬영했던 것이다. 물론 이를 악의적인 신성모독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플로베르의 친구이기도 했던 이 박식한 교양인의 처신은 그리 적절한 것이 못된다. 노트르담 성당에서도 과연 그리 했을 것인가. 타문명의 유적을 사진으로 담아내겠다는 욕심이 앞선 나머지 대상에 대한 존중은 염두에 두지 않았던 셈이다.

여행사진가들의 탐욕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19세기 중후반과 20세기 초반은 여행사진의 전성기였으며, 마치 세계 전체를 사진에 담아내기라도 할 것처럼 여행자들은 어마어마한 양의 사진을 생산해 냈다. 하지만 실제 여행사진에 담긴 세계의 모습은 상당 부분 변질되어 있다. 그렇다면 여행사진은 왜, 어떻게 세계를 변질시켰는가.

여행사진의 정서는 본질적으로 이국취향과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 평소에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을 굳이 사진에 담아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사진에서는 평범함과 일상성이 주제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여행사진의 목적은 다른 데 있다. 여행은 낯선 세계와의 만남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행사진은 낯설고 기이한 세계를 찾아내어 보여주고자 한다. 여행자들은 이국정서 때문에 낯선 세계에 반하고, 그 정서를 고스란히 사진에 담아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본래 모든 세계란 현지인들에게는 전혀 이국적이지 않다. 그들에게 이국적인 세계는 자기 세계의 바깥에 있다. 결국 여행자들은 자신이 속했던 세계와는 이질적인 모습에 눈길을 돌리게 마련이고, 그렇게 생산된 사진에는 이국정서가 담길 수밖에 없다.

19세기 서양의 여행자들은 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에서 여행지를 바라보았다. 중동지역과 아시아, 아프리카 등 그들에게 ‘타자’였던 세계는 미개하고 열등한 나라이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다. 그리고 그들의 여행사진에는 이러한 시각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서양에 비해 물질적으로 낙후된 세계에서 여행자들은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주로 사진에 담았고, ‘평균인’에 못 미치는 하층 계급의 사람들이나 병자, 맹인, 걸인들에 관심을 쏟았다. 그들은 단지 ‘포토제닉한’ 피사체였을 뿐이다. 개항 이후 한국을 방문했던 서양의 여행자들도 주로 이런 관점을 유지하고 있었다. 상하수도 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서울 거리는 그들에게 더럽고 불결하며 비위생적인 곳으로 각인되었고, 궁궐은 아직 ‘민주적 공화제’를 채택하지 못한 구체제의 왕조가 칩거해 있는, 겉모습만 웅장한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또한 한국의 아이들은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거리를 배회하는 ‘가엾은’ 대상이었으며, 하층 계급의 여인들은 젖가슴을 드러내놓고 생활하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미개한 인간으로 간주되었다. 서양의 여행자들은 그렇게 한국을 보았고, 그렇게 한국을 찍었다.

잃어버린 경험

사실 한국의 여행자들이 세계 각지에서 찍어오는 사진이 이와 다르지 않다는 보장이 없다. 특히 동남아나 인도, 중국의 일부 지역처럼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을 여행할 경우 타자의 시각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반대로 유럽이나 아메리카 지역에서 촬영한 사진은 동경과 선망이 섞여 이상화된 형태인 경우가 다반사이니 참으로 우스운 노릇이다. 이런 관점에서 생산된 방대한 양의 여행사진들은 세계에 대한 지식을 담고 있는 책과 다를 바 없다. 그렇게 여행사진은 세계를 사진이라는 책 속에 구겨 넣는다. 세계가 이미지로 축소되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 앨범이나 책상서랍 속에 사진을 처박아 넣어두었듯이 컴퓨터에 데이터 상태로 세계를 저장해둔다. 얼마 전까지 세계가 단지 종이 위에 출력된 이미지에 불과했다면 이제는 숫자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데이터로 전락한 것이다.

옛 어른들은 사람이란 여행을 해보아야만 성숙해진다고들 했다. 그리고 사람을 알려면 함께 여행을 해보라고 했다. 여행이 시야를 넓혀준다는 의미일 게다. 자기 세계에만 갇혀 살면 다른 가치를 보지 못한다. 따라서 다른 세계를 봄으로써 내가 몰랐던 다른 가치들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여행은 인간을 고양시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여행은 과거처럼 살아있는 경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회적인 유희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사람들은 세계를 체험하러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디지털 데이터화시키러 간다. 인화된 사진을 수집하는 것이 곧 세계를 수집하는 것이라 믿었던 시대가 있었다. 그래도 그 때는 비록 종잇조각에 불과한 이미지라 할지라도 앨범 속의 세계를 꺼내보면서 회상에 잠기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마저도 하지 않는다. 폴더 속에 데이터로 저장해둔 채 만족해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여행사진은 세계에 대한 데이터(정보)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욕망은 만족을 모르는 법이다. 하여 여행자들은 자신이 찍지 않더라도 쉽게 구해 볼 수 있는 여행지의 모습을 직접 찍어 와야 만족해한다. 오늘날처럼 여행사진이 도처에 넘쳐흐르고 손쉽게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결국 같은 데이터가 무한히 반복 재생산되는 셈이다. 굳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자신의 경험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여행지에서의 생생한 경험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조급한 욕망에 집착할 까닭이 있을까 싶다. 혹여 그것이 사진 중독의 병리적 징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진을 찍지 않으면 여행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는가?

(계간 황해문화 2011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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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무한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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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테크놀로지의 급속한 팽창으로 사진의 생산과 유통 방식이 크게 변했다. 여전히 아날로그를 고수하는 이들이 있지만 카메라에서부터 인화에 이르기까지 디지털은 현재 ‘대세’이며, 앞으로 이런 경향은 점점 확산될 것임이 분명하다. 이 속도는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빨라 어느덧 아날로그 카메라는 중고품 시장에서 헐값에 거래되고 있으며, 현상약품과 인화지는 구하기조차 어렵다며 푸념하는 소리도 들린다. 대학 사진학과에서는 더 이상 암실 테크닉을 교육하지 않고, 오히려 디지털 기술의 습득에 더 중점을 둔다. 바야흐로 디지털 사진의 시대가 열린 셈이다. 이런 조건 하에서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작가가 있고, 부분적으로만 수용하는 이도 있다. 단지 편리해서 취하는 이도 있고, 편리하더라도 물성이 강하다고 싫어하는 이도 있으며, 사진에 대한 ‘철학’ 때문에 거들떠보지도 않는 이가 있다. 당연히 정반대의 ‘철학’ 때문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도 있다. 요는 사진가들이 디지털 사진에 대해 취하는 입장이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갈린다는 것이다.

디지털 사진이 처음 출현했을 무렵 논자들은 이것이 사진의 진보인지, 혁명인지, 즉 아날로그 사진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와 단절하고 새롭게 탄생한 이미지 생산방법인지 혼란스러워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 여전히 명확한 확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양상을 보면 디지털 사진과 아날로그 사진의 차이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인상을 준다. 물론 이미지의 생성원리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결과물은 크게 다르지 않다. 양자 모두 카메라라는 광학도구가 개입하여 ‘기계적으로’ 만들어낸 이미지인 것이다. 아날로그, 디지털의 구분 없이 사진은 일점 원근법을 근간으로 삼고 있으며, 원추형 투사(Conical projection)의 원리에 따라 실재와 유사한 이미지를 무한히 복제해 낸다. 그런 점에서 디지털은 단지 수단일 뿐이다. 그런데 디지털 사진의 경우 이미지의 생산 과정에 조작(Operation)이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여 이미지 생산자들은 손쉽게 이미지를 변형시켜내곤 한다. 전문가들조차 구분해내기 어려울 만큼 조작은 간단하고 정교하다. 실제로 많은 작가들이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이런 특성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작품을 생산해내고 있다.

현실과 허구, 실재와 가상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이런 이미지는 고전적인 사진 개념에 역행할 뿐만 아니라 때로 비 사진적인 이미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진은 오랫동안 ‘현실의 기록’으로, 나아가 ‘진실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실재보다 가상을, 현실보다 환영을 쫓는 오늘날의 디지털 이미지는 과연 사진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이런 질문은 이미 내부적으로 한계를 설정해 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즉 사진은 태생적으로 ‘현실의 복제’ 수단이었기 때문에 감히 현실을 넘어서려는 발상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진술의 발명 이후 170여 년 동안 사진은 줄곧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들어 왔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차근차근 사례를 들어가며 언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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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기술이 개량과 진화를 거듭해나감에 따라 이러한 경향은 점차 심화되는 추세다. 형태를 전면적으로 바꾸어 버리거나 가상의 형태를 조합해 내는 작가들은 차치하고라도 현재의 작가들은 대부분 사진에 수정을 가한다. 포토샵을 통해 톤과 색상을 보정하거나 형태를 명확히 하기 위해 윤곽선 처리를 하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 주제를 해치는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하여 시각적 집중도를 높이는 일도 흔하며, 반대로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형태와 색상을 미세하게 변형시키는 경우도 많다. 물론 눈에 띄지 않는 범위 내에서 행하는 이러한 ‘조작’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치 아날로그 흑백 사진 인화에서 톤을 강조하기 위해 닷징이나 버닝을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구르스키의 경우 아주 정교한 포토샵을 활용하고 있으며, 같은 베허스쿨 계보에 속하는 토마스 루프 또한 그렇다. 예컨대 토마스 루프의 <포트레이트> 연작은 모델들의 눈동자에 게르만 인종의 특성이랄 수 있는 푸른 색조를 가미한 작업이었다. 이러한 ‘조작’이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까닭은 근본적인 형태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기본 형태를 강화한다. 이는 마치 스튜디오에서 초상사진을 찍은 후 눈, 코, 입의 형태를 강조하기 위해 간단한 보정처리를 하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 초상사진의 수정은 사실 아주 오랜 역사를 갖고 있어서 사진술 발명 초기의 사진사들은 뛰어난 수정기술자이기도 했다. 요컨대 수정은 형태를 변형시키는 기술이 아니라 형태를 강조하는 기술이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자면 이 또한 미시적이나마 형태의 변화를 가져온다. 따라서 디지털 사진에서 사용되는 미세한 수정이 문제될 까닭은 없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현실감(reality)의 농도이다.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여 현실감에 변화를 주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형태의 조합이다.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추출해 낸 이미지 조각들을 퍼즐처럼 끼워 맞추는 것이다. 일종의 몽타주 기법과 유사하다 하겠다. 유년기의 기억에서 시작하여 꿈과 환상의 세계에 대한 현대인의 동경을 동화적 시각으로 표현하고 있는 원성원의 작업이나 근대 문화의 뒤틀린 욕망이 서구문화와 뒤섞여 오늘날 어떻게 우리의 일상에 침투해 있는가를 보여주는 난다의 작업, 개별적인 나무 이미지들을 조합하여 거대한 원시림의 형상을 구축해 나가는 이혁준의 작업 등이 여기에 속한다. 서로 이질적인 사물과 공간을 중첩시켜 디지털 매체가 촉발시킨 지각의 변화에 천착하는 임상빈이나 그림과 사진을 합성하여 전통적인 산수화의 개념을 비틀어나가는 임택의 작업도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이런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작품의 재료로 쓰이는 기본 이미지가 형태의 왜곡 없이 등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최종적인 작품은 카메라로 찍어낸 사진들을 기본 단위로 삼고 있다. 디지털 카메라로 찍든, 아날로그 카메라로 찍어 필름을 스캔하든 작품의 출발은 사진인 셈이다. 이런 작업은 형식의 측면에서만 보자면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이미 1930년대의 아방가르드 사진에서도, 나아가 19세기의 예술사진에서도 유사한 기법이 활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1850-60년대에 영국에서 활동했던 레일랜더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1857년 작 <인생의 두 갈림길>은 30여 장의 네거티브 필름을 정교하게 합성하여 한 장의 사진으로 인화해 냄으로써 사진은 자연을 충실히 재현해내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일반의 인식에 도전장을 던졌다. 그의 조합인화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려 복잡한 논쟁을 야기했지만, 조합인화에 대한 사진가들의 열망은 좀처럼 식지 않았다. 레일랜더에게 조합인화법을 배운 헨리 피치 로빈슨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조합인화야말로 사진에 작가의 혼과 영감을 불어넣는 유효한 방법이라 믿고 적극적으로 이를 활용한 경우다. 그의 작업에 대해 사진사가들은 ‘회화주의 사진’이라 폄하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스트레이트 사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했던 미국의 사관이 반영된 결과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스트레이트 사진’의 귀결점은 추상이었다. 따라서 조합인화에 대한 폄하는 사진에 대한 당대의 인식을 반영할 뿐이다. 거기에는 ‘축소된 사진 인식’이 바탕에 깔려있다.

이는 아방가르드의 시대에 등장한 포토몽타주에 대한 인식과 비교해 보았을 때 잘 나타난다. ‘시각적 혁신’이 주요 의제였던 아방가르드의 논리에서 볼 때 콜라주나 몽타주는 관습적인 시각에 균열을 가져오는 유효한 방법론이었다. 로드첸코나 쿠르트 슈비터스에서부터 라울 하우스만이나 존 하트필드와 같은 베를린 다다이스트에 이르기까지 콜라주, 몽타주는 환영받는 기법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포토샵을 활용하여 이미지를 조합해 내는 현상이 특별히 새로울 것은 없다. 우리는 다만 전례들을 망각하고 있을 뿐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수작업을 통한 조합과 디지털 기술을 통한 조합의 차이를 부풀려 중요한 사태로 받아들이고 있을 따름이다. 물론 관점에 따라 이 차이는 근본적인 사안이 될 수도 있다. 마치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낸 이미지(그림, 도안 등)와 기계가 만들어 낸 이미지(사진)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발생하듯 말이다. 후자의 경우 신체에 축적되어 있는 복잡한 유기체의 메커니즘, 요컨대 개인의 기억이나 감성, 취향, 스타일 등이 이미지의 생산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다. 기계적 조합의 경우에도 이런 불연속성이 생겨날 수 있다. 그러나 이 차이에 대한 고려는 오히려 포토샵을 사용한 조합된 이미지가 결국 기계적 방식으로 생산된 것임을 강조할 따름이다. 즉 이런 이미지는 수작업으로 제작된 조합사진보다도 오히려 기계적 이미지의 속성이 강하므로 더욱 ‘사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셈이다. 따라서 여러 장의 사진을 조합해낸 이미지를 두고 사진인지 아닌가를 묻는 것은 핵심을 비켜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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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건은 오히려 원형이 없는 이미지를 어떻게 볼 것이냐의 문제에 걸려 있다. 디지털 기술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하는 작가들은 파일 상태의 이미지를 변형시켜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형상화시켜낸다. 예를 들어 오를랑(Orlan)의 경우 스스로 성형수술을 하여 서구 중심적 미인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얼굴 형태를 제시해주던 방식을 바꾸어 이제 디지털 합성을 통해 다양한 문화권 속의 미인을 가공해 낸다. 그녀가 보여주는 인물들은 기실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던 가상의 여인들이다. 포토샵이라는 팔레트를 사용하여 그려낸 기계적 그림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조합 사진의 경우 최종 이미지를 구성하는 개별 단위들은 모두 현실의 조각들이다.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에는 히틀러의 모습도 있고, 괴벨스의 실제 얼굴도 있다. 난다의 사진에 등장하는 ‘모던 걸’ 또한 실제로 존재했던 세트장을 거닐고 있으며, 원성원의 사진을 구성하는 나무와 집도 원래의 공간에서 유리되었지만 실제로 어딘가에 있었다. 이 모든 요소들은 각기 자신의 지시대상을 분명히 갖고 있다. 반면 가공된 대상, 결코 존재했던 적이 없는 형상들은 자신의 지시대상을 현실 속에서 만날 수 없다. 오히려 이러한 이미지들의 지시대상은 이를 통해 작가가 지향하는 개념이나 속성들에 가깝다. 어떤 점에서 컴퓨터 그래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이미지들은 예술보다는 광고나 일러스트, 게임 등 환영의 효과를 노리는 분야에서 꾸준히 확장하고 있다. 비록 소수이지만 현대의 예술가들 또한 점차 그래픽 영상에 관심을 보이는 추세다.  

이런 작업들이 기존의 사진담론에 던져주는 파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아날로그 사진의 시대에는 비록 허구와 비현실의 세계를 넘나드는 이미지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사진이 현실의 기록이라는 담론의 성채가 여전히 굳건했었다. 사진은 명증한 기호이자 현실과의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는 ‘기이한’ 이미지였던 것이다. 하여 바르트는 사진의 본질이 ‘그것은-존재-했었음’이라 규정할 수 있었다. 사진은 필연적으로 지시대상과 뗄 수 없이 달라붙어 있으며, 그 대상은 ‘실재(實在)’에 토대하고 있다는 생각도 부정하기 어려운 논리였다. 이의 연장으로 ‘다큐멘트(Document)’ 개념이 현대미술에 조금씩 스며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한 세기 이상을 지배해 왔던 기존의 사진담론은 거센 도전을 받게 되었다. 어린아이도 휴대용 카메라로 손쉽게 사진을 찍고 포토샵을 이용하여 이미지를 변형시킬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일상에서의 작은 변화들이 축적되어 한 시대의 감수성과 취향, 관습을 바꾸어 나간다면 사진문화의 변화는 필연적이다. 그리고 사진이 일상화된 오늘날 이 문화를 해석하는 담론도 당연히 바뀌어야 한다. 본래 테크놀로지가 일상에 미치는 영향과 변화의 속도는 매우 빠르다. 그에 비해 예술의 변화는 훨씬 더디며 때로는 테크놀로지의 파도 앞에서 제 자리를 지키려고 버틴다. 하지만 비록 더디더라도 예술의 역사는 항상 그 변화에 조응해 왔다. 따라서 오늘날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가져오는 변화를 예술도 천천히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포토샵을 활용한 사진의 유형이 갈수록 다변화되고 있음이 그 변화의 징후라 할 수 있다. 비록 사진에 적용되는 디지털 기술이 아직은 이미지의 조합과 합성을 편리하게 하는 단순한 도구로 머물고 있지만 말이다. 한편 일상 속에서의 변화 양상은 훨씬 빠르고 폭도 넓은 편이다.

그러나 비록 ‘진실성’에 토대하고 있던 사진 개념이 예술담론 속에서 흔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진은 사실 관계를 입증하는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 물론 이 지점에서도 테크놀로지의 파급력은 속속 현실화되고 있다. 예컨대 과거 사진기자들의 전유물이었던 ‘보도사진’은 휴대용 카메라를 소유한 익명의 대중으로 대체되기도 하고(인터넷상에 올라오는 쓰나미 사진의 경우처럼), 항상 어디에나 시선을 열어놓고 있는 CCTV가 사건현장(교통사고의 경우처럼)의 파수꾼 역할을 하기도 한다. 카메라라는 기계가 한 눈을 부릅뜨고 모든 것을, 언제나, 어디에서나 찍고 있는 것이다. 즉 사진은 여전히 ‘선택된 진실’을 알려준다.

한편 예술을 자청하는 오늘날의 디지털 사진은 ‘진실’이라는 담론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리고 예술은 언제나 그랬다. 즉 예술은 과학(Science)이 할 수 없는 것을 행한다. 예술이 할 수 없는 것을 과학이 하듯이 말이다. 오히려 예술은 과학이나 학문이 던져준 진실을 의심하고 회의하며 때로는 함정에 빠뜨릴 때 예술답다.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이를 실행해 옮기는 편리한 도구다. 허구와 가상의 세계를 제안하는 디지털 이미지가 사진인지 아닌지를 묻는 것은 그 이미지가 진실이냐 아니냐를 묻는 것과 별로 바를 바가 없다. 그 질문 속에는 사진은 ‘진실한 이미지’라는 전제가 암묵적으로 깔려있기 때문이다. 또한 거기에는 축소된 사진 개념이 은닉되어 있으며 현대예술을 장르에 따라 구분하고자 하는 모더니즘의 유산과 편의적 태도가 함께 작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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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정리를 위하여 테크놀로지와 예술의 관계에 대한 주요 논점을 정리해보기로 하자. 예술은 기예(Art)이기 이전에 테크네(Techne)로 출발했다. 테크놀로지는 항상 예술의 생산 방식을 바꾸는 원동력이었고, 여기에서부터 시대의 감수성과 취향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아주 멀리는 선사시대의 동굴벽화에서부터 가깝게는 사진에 이르기까지 테크놀로지의 개입은 비록 더디지만 근본적인 변화의 동인이었다. 동굴 벽에 식물을 갈아 만든 분말과 대롱을 사용하여 착색을 하면서 마그달레니아기의 벽화에 큰 변화가 생겨났으며, 유화물감의 발명과 튜브의 사용은 프레스코화에서 이젤화로의 변화를 초래한 계기였다. 사진술의 발명은 기계적 이미지를 통한 새로운 시각문화를 개척해 나갔으며, 망판인쇄술은 사진 이미지의 무한복제를 가능케 함으로써 오늘날의 이미지 시대를 여는 데 초석이 되었다.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가장 최근에 생겨난 것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른 속도로 일상에서부터 예술에 이르기까지 이미지의 생산과 소비, 유통에 큰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의 범위와 속도는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우리는 뢴트겐 사진이 처음 등장했을 때의 충격을 알고 있다. 또한 적외선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이 보여주는 비가시적인 세계의 모습에 대해서도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한발 더 나아가 소너 스캔을 사용하여 만들어낸 해저 지형의 모습은 빛이 아닌 다른 매개물을 통해서도 유사 이미지를 얻어낼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비슷한 의미에서 1991년 마젤란 호가 가시광선이 통과할 수 없는 금성의 대기를 뚫고 얻어낸 금성 사진은 또 어떤가. 사진을 ‘진실한 이미지’로 인식해 왔던 패러다임뿐만 아니라 사진은 ‘빛(Photo) 그림(Graphy)’이라는 정의 또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이미 테크놀로지가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어 무한히 이미지의 생산 방식을 전복시켜나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현재 사진의 영역에서 활용되는 디지털 기술은 아주 제한적이다. 단지 형태를 조합하거나 변형시키는 기법 정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테크놀로지는 도구이지만 예술은 도구를 사용하는 정신의 활동이다. 도구를 무시하는 정신도 절름발이이지만 도구에 잡아먹힐 것을 두려워하는 정신 또한 나약하기 그지없다. 그런 점에서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마주한 예술의 태도를 진지하게 성찰해볼 시점이 되었다.


(월간미술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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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헌

사진 2011/04/16 23:05
한미사진미술관의 민병헌 개인전, 아직 가보지 못해서,(가볼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자료를 찾아 봤더니 2004년에도 한미에서 한 번 개인전이 있었다. 그 당시 썼던 전시리뷰가 있어서 올려본다. 어디에 실렸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쉬운 점 하나, 한미사진미술관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사진이미지들은 오른쪽 마우스가 작동하지 않아 퍼갈 수가 없다. 고화질도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할 필요가 있나 싶다. 그것이 작가들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텐데, 사진 저작권 문제에 대해 너무 배타적인 듯. 이 문제를 공론화시킬 필요도 있다고 본다. 사진미술관, 가급적 여러 사람에게 사진을 보여주기 위한 공간 아닌가!



감춰진 풍경 - 민병헌 사진전 (2004. 9.4 - 10. 16)

민병헌의 신작 사진을 한미 갤러리에서 만날 수 있다. 이번에 선보이는 그의 사진들은 80년대 이후 일관되게 작업해 왔던 풍경사진의 후속이다. 초기 사진들에 붙여진 제목 ‘별거 아닌 풍경’이 암시하듯 그는 사진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는 행위를 쑥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런 태도는 그의 사진에 나타나는 사물들이 자신을 수줍게 펼쳐보이게끔 만든다. ‘별거 아닌’ 사물들을 어떤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처럼 드러내는 것이 쑥스러운 것이다.

이번에 전시되는 사진들에서도 역시 그와 유사한 태도가 조금 다른 방식으로 변형되어 나타나고 있다. 작가는 수줍음의 시각이라고나 부를 수 있을 법한, 종래에 자연 풍경을 보여주어 왔던 태도를 약간 수정하여 이번에는 사물들을 감추려 한다. 그것은 수줍음이 한결 심화된 형태이다. 어두운 흑색 톤 뒤로 숨어버리는 자연의 모습을 온전히 알아차리기 위해서 관객들은 약간의 수고를 감내해야 한다. 어둠은 어둠으로 감추고 밝음은 밝음으로 감추는 작가의 인내어린 땀 냄새를 그렇게 해서야 맡을 수 있다. 하지만 감춘다고 해서 제대로 감춰지겠는가? 사진이 사물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면 그의 사물 감추기는 일종의 놀이에 가깝다. 다시 말해 작가는 온전히 감출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온전한 감추기는 결국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자신의 작업을 감추기 놀이가 아니라 보이기 놀이로 만드는 미세한 장치들을 마련해 놓는다. 마치 술래인 어린 아이가 아무 자취도 남기지 않고 숨어버린 친구들 앞에서 난감해 할 때 숨바꼭질은 놀이로서의 재미를 잃어버리듯이, 놀이가 즐겁기 위해서는 숨은 아이의 옷깃 하나라도 보여야 하며 하물며 어디 숨어있는지 짐작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 흥미와 긴장은 거기에서 나온다. 민병헌의 감추기 놀이는 그래서 감춤의 원칙에서 보자면 서툰 감추기이다. 하지만 감추기란 본래 서툴러야 하지 않겠는가? 완벽한 감추기는 속임수이자 상대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어둠의 사이사이에서 간헐적으로 희미하게 드러나는 사물들은 그래서 감추기의 폭력을 억제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감추기와 드러내기 사이의 균형이 어긋나 한 쪽으로 쏠린다면 어설픈 감추기, 혹은 적나라한 드러내기가 될 터이고, 그것은 작가가 싫어하는 방식이다.

작가는 어둠으로 감추는 데에는(그것이 가장 일반적이고 손쉬운 방법이므로) 이미 흠잡을 데 없는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밝음으로 감추는 작업은(그것이 가장 어려우면서 동시에 상식, 혹은 원리를 부수는 방식이므로) 실행해 옮기고는 있지만 때때로 주저하는 듯 해 보이기도 한다. 사물 감추기가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는 과시(誇示)의 어리석음을 피해서 최소한만을 보여주려는 현명한 보여주기의 길이라면, 작가의 감추기 작업은 겸손한 보여주기이다. 수줍음과 겸손을 작업의 방법론으로 삼은 작가가 상식과 원리에 맞서는 행위를, 다시 말해 빛에 맞서는 행위를 주저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밝음이 항상 사물을 보여주는 데 있지만은 않고 과도한 밝음은 때로 그것을 감출 수도 있음을 작가는 지혜롭게 터득하고 있다. 밝음으로 감추기는 그러한 밝음의 맹목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작가는 오히려 어둠은 드러내기의 방법론으로, 밝음은 감추기의 방법론으로 교묘한 역전을 시도하기도 한다. 어둠 속에서 더욱 잘 드러나는 사물이 있음을, 반대로 밝음 속에서 효과적으로 숨는 사물이 있음을 그는 구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업에서 감추기와 드러내기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감추기로 그의 작업의 틀이 이동하고 있다면 그는 이제 치열한 싸움터로 접어들고 있는 셈이다. 수줍게라도 드러내는 것은 싸움을 피하는 것이지만 적극적인 감추기는 이제 드러내 보여주기라는 시각예술의 거대한 원칙에 맞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싸움은 시각의 가치를 취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시각 개념을 상대화시켜 그것의 새로운 가치를 찾기 위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감추기 놀이는 보여주기의 확장이자 심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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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호 인터뷰

사진 2011/03/20 17:49
신문, 잡지에 실리는 인터뷰를 잘 읽어보지 않는 편이다. 요식적이어서 하나마나한 얘기가 대부분이고, '필터링'을 많이 하기 때문인데, 딴지일보의 인터뷰는 가끔씩 본다. 딴지일보의 인터뷰는 뭐랄까, 차원이 좀 다르다. 조금이라도 걸러내는 부분이 있을텐데, 솔직하고 적나라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미있다! 사진가 최광호와의 인터뷰가 있어 읽어봤는데, 사진잡지들에서 했던 인터뷰보다 훨 낫다. 사진잡지들에서 하는 인터뷰들은 너무 형식적이어서 들으나마나 한 얘기들이 대부분인데, 이 인터뷰는 최광호를 발가벗겨낸다. 최광호 선생, 참 독특한 양반이다.

http://www.ddanzi.com/news/5792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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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원고

사진 2011/03/18 00:55

컴퓨터 안에 문서정리가 잘 안되어 있어 정리 겸해서 폴더를 뒤적거리다 보니 묵은 글이 있어 하나 올려본다. 찾아보니 2006년 <교수신문>에 실렸다. 매체에서 제목을 이상하게 바꿔놔서 뭐라 했더니 그 후론 연락이 없어 참으로 잘했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아래 제목은 원래 제목이다.

감각 제일주의가 낳은 편향성

1980년대 중후반부터 약 20년간 구본창은 줄곧 한국 현대사진의 한 줄기를 이끌어 온 대표작가로 꼽힌다. 기존의 한국 사진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새로운 형식과 작가 특유의 섬세한 감각은 많은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젊은 작가들에게도 적잖은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80년대 중반 이전까지의 한국사진이 보여주었던 편향성에서 기인한 바 크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사진은 이미 완성되며, 이후에 개입하는 수작업은 사진의 본성을 해친다는 생각은 그 때까지의 한국 사진을 지배하는 보편적인 규범처럼 간주되고 있었다. 구본창이 추구했던 자의식의 표현이나 형식적 실험, 개념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표현 방법은 이러한 규범에 비추어 보았을 때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태도였다. 하지만 형식에 경계를 부여해 왔던 관행은 자유롭고 다양한 표현수단을 필요로 하는 작가들에게 더 이상 호소력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그의 사진은 형식의 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진가들의 요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업이 80년대 후반 이후 자유로운 사진 형식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했음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의 사진세계 전체에 대한 일반의 평가에는 적지 않은 과장과 상투적인 찬사가 스며있다. 일관되게 하나의 세계를 추구하기보다 끊임없이 새로움을 찾아나가는 작가에게 그러한 찬사는 약이 아니라 독이 되었음직하다. 게다가 그 찬사는 작가의 사진세계에 대한 공정한 평가에서 나왔다기보다는 오히려 유명작가를 원하는 일반 관객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요식적인 행위에 가깝다. 

초창기의 칼라 작업 <열 두 번의 한숨>과 <일분간의 독백>에서부터 <긴 오후의 미행>, <탈의기>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형식에 개의치 않고 자의식을 표현하는 데에 몰두했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통해 그의 사진은 세간에 알려져 한국 ‘현대사진’의 새로운 경향을 일궈낸 작업으로 평가받았다. 자화상에서부터 시작하여 일상의 소품들, 자연풍경, 거리모습, 도처에서 취합한 다양한 사물들을 모아 편집하여 전혀 새로운 낯선 이미지를 구성해 내는 이 작업들은 내밀한 개인적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양한 이미지들을 병치하여 재구성한 이 사진들은 철저하게 감각에만 의존하고 있어 작업을 지배하는 일정한 규칙을 찾아보기 어렵다. 고독과 우울, 권태, 소외 등 작가 자신의 내밀한 감정이 지배하는 이 사진들에서 의미를 읽어내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배타적 주관성과 자의식 과잉은 오히려 현대성이라는 이름과 맞물려 그의 사진세계를 규정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자리 잡았다.  

90년대에 들어와서도 그의 형식적 실험은 계속된다. <무제>와 <포토그램> 연작, <아! 대한민국>, <태초에>, <In the Beginning>, <Good Bye Paradise>와 같은 작업들은 관심이 투영되는 대상들만 바뀔 뿐 작업의 초점이 표현 형식의 확장에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포토그램과 콜라주, 혼합 재료, 각종 오브제는 물론 재봉기술, 상자까지 동원한 이 작업들에서 작가는 계속해서 새로운 표현수단을 도입하는 데에 골몰했다. 하지만 이미 서양의 현대미술에서 시도되어 온 형식들을 다시 사용하는 작가에게 새로운 형식을 찾아 나선 작가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오히려 이 작업들은 작가 자신에게는 습작과 같다고 하는 편이 더 합당하다. 다양한 형식적 모방을 통해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과정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작업들은 원숙한 한 작가의 완성된 세계를 보여주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 세계를 구축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겪는 시행착오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 요컨대 이러한 사진들이 한국 현대사진의 주된 흐름을 이끌어 왔다고 평가받는 현상은 기이하기까지 하다. 

이후 <숨>과 <Ocean>, <White> 시리즈에서 작가는 형식 실험보다는 감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에 몰두한다. 사실 작업의 내용과 의미보다 형식미를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는 이 사진들뿐만 아니라 초기부터 줄곧 그의 사진을 지배하고 있었다. 감각에 의존하여 세련된 이미지를 추출해 내는 그의 재능은 분명 뛰어나다. 하지만 조형성과 감각적 이미지에 탐닉하는 그의 작업에 세계와 역사를 대하는 작가의식이나 예술의 역사를 이해하고자 하는 치열함은 부족하다. 한국 사진의 현대성을 구현하고 있다고 평가받는 작가가 감각적으로만 뛰어나다고 한다면 한국의 현대사진을 관통하고 있는 정신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독일 유학 이후 귀국하여 보여 준 그의 사진은 현대적이라는 이름하에 한국 사진에 갑작스런 단절을 끌어들였다. 만약 그에게 80년대 이전까지의 한국사진에 대한 이해가 충분했다면 그의 사진은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서양 사진에는 정통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잘 알지 못했던 불균형한 감각 때문에 그가 끌어들인 단절의 골은 더욱 컸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서양 사진을 무분별하게 수용한 결과물이라는 소리 없는 비난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자기 갱신을 해 나가는 부지런함과 완벽을 추구하는 엄밀함을 같이 갖춘 작가가 이러한 비판 앞에서 태연자약할 수는 없다. 반드시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닐지라도 90년대 후반부터 작가는 한국적인 소재를 찾아 나서면서 그 동안 소홀히 해 왔던 ‘한국적인 사진’으로 관심을 돌린다. <탈>과 <백자> 시리즈는 그 분야의 전문가들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오랜 연구를 병행한 끝에 나온 작업의 결과물이다. 피사체가 전통 문화와 관련된 대상이라고 해서 반드시 한국적인 사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작가는 이 작업을 통해 적어도 서양 모방이라는 비판으로부터는 자유로워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작업들이 작가의 위상에 걸 맞는 온전한 지위를 얻어내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아 보인다. 우선 그가 카메라를 통해 전통 문화를 해석하는 시각이 오히려 우리 문화에 대한 왜곡은 아닌지 따져보아야 한다. 작가는 우리 문화를 주관적으로 해석하려 하고 있지만 해석의 형식은 기록에 가까워 보인다. 작가의 주관이란 무고한 것이지만 대상에 대한 존중은 주관이 줄어드는 데서 나온다. 전통문화를 대상으로 한 기존의 뛰어난 기록 작업과 비교할 때 그의 작업은 아직 시작 단계에 있다. 자유로운 해석과 가급적이면 대상에 충실하려는 태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의 작업이 전통문화에 대한 충실한 기록과는 근본적으로 접근 방식부터 다르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이 작업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198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한국 사진은 큰 변화를 겪어왔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구본창이라는 작가가 있었다. 그는 감각이 뛰어났고 대상을 세련되게 꾸며내는 재능을 갖고 있었다. 일반 관객들이 그의 사진에 매혹당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기존의 규범 바깥으로 뛰쳐나가면서 작가는 한국사진의 가능성을 확장시켰지만 지나치게 감각과 세련된 형식을 중시한 나머지 한국의 현대사진에 또 다른 편향성을 끌어들였다. 현대를 이끄는 규범을 한두 가지로 축약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겉이 속을, 모양이 정신을 지배하는 모습은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구본창이 기존의 규범에 도전하여 한국 현대사진의 지평을 넓힌 대표작가라는 평가는 일면 타당하지만 어떤 정신이 그 도전과 개척 행위를 지배하고 있었는가를 꼼꼼히 살피는 것은 이제부터이다. 그것 없이 맹목적인 찬사는 공허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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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라이트 / 카피레프트 : 사진저작권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최근 한미자유무역협정에 관한 추가협상이 타결되어 비준을 기다리고 있다. 여기에는 저작권에 관한 사항이 포함되어 있으며, 골자는 저작권 소멸 시한을 기존 저자 사후 50년에서 70년으로 연장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미국이 거두어들일 저작권 수입은 천문학적 액수일 것으로 추산된다. 단적인 예로 1966년에 작고한 월트 디즈니의 저작권 소멸 시한은 이 법안이 가결된다면 향후 25년 남짓 연장된다. 그 때가서 다시 연장하겠다고 고집 피우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미키 마우스’나 ‘도날드 덕’이 거저 가져다주는 로열티 수입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지만 그만큼 저작권 문제가 소위 자본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현행 저작권법은 크게 저작인격권과 저작재산권으로 나뉜다. 저작인격권은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으며 소멸시한이 따로 없다. 자신의 저작물을 공표할 수 있는 권리(공표권), 저작권자의 이름을 밝힐 권리(성명표시권), 저작물의 내용을 바꾸지 못하게 할 권리(동일성 유지권)가 여기에 속한다. 한편 저작재산권은 저작권자 사후 타인(예를 들면 유족)에게 권리를 양도할 수 있으며 보호받는 기간도 제한되어 있다. 저작물을 재산으로 간주하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수익을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라 할 수 있는데, 저작권을 둘러싼 대부분의 갈등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출판, 음반, 공연, 방송 등 각 분야마다 저작재산권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의 문제는 점점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가고 있다. 이는 그만큼 저작재산권을 침해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으며, 침해의 유형도 다양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저작인격권의 문제도 포함된다. 한편 저작물의 공유를 주장하는 입장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리차드 스톨만이 개념화시킨 카피레프트(Copyleft)이다. 소프트웨어와 저작물의 공유를 주장하는 그의 입장은 카피라이트를 인정하는 바탕에서, 즉 저작권법의 테두리 안에서 저작물을 공유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저작물을 소수가 독점해서는 안 된다는 것, 요컨대 지식 정보의 습득과 유통은 만인에게 열려있어야 한다는 것이 골자라 하겠다.

두 입장은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호보완적인 장치이다. 그 점은 추후 다시 언급할 것이다. 어쨌든 두 입장은 각기 나름의 타당성을 갖고 있다. 한 개인의 지적 생산물을 보호해야 함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모든 지적 생산물이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유해한 지식도 있고, 엉터리 지식도 있으며, 명백히 악한 지식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저작물에는 일단 공정한 지위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 카피라이트는 이를 법적으로 보호하는 장치이다. 그런데 현재의 저작권법은 지나치게 배타적이어서 건강한 지식의 공유를 가로막는 도구가 되어가는 측면이 있다. 무분별하게 저작권법을 남용하는 것이 단적인 사례이다. 예컨대 요즘의 초등학생 아이들은 자신의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친구들과 소통하는데, 인터넷상에서 지식 정보나 이미지를 카피해 올 때 현행 저작권법에 위배되는 경우가 생긴다. 물론 원칙은 아이들에게 타인의 저작물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점을 교육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의 행위를 도매금으로 싸잡아 저작권법 침해로 고발하는 것은 덫을 쳐놓고 걸리기를 기다리는 사냥꾼의 행위와 진배없다. 저작권자의 권리는 보호하되 지식의 건강한 공유를 위한 방법 또한 함께 마련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 저작물이 진정 가치 있는 것이라면 공유의 필요성 또한 커지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지적 생산물이 온전히 그 개인만의 것인지도 따져 물어야 한다. 문명사를 거쳐 간 수많은 지식 생산자들은 모두가 저작물의 자양분을 자신이 속한 전통에서 끌어왔다. 고전을 읽거나 타인의 경험과 지식에서 배워오는 과정이 없었다면 어떻게 하나의 지적 생산물이라는 것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만약 저작권의 원칙만을 따지자면 그리스 신화에서부터 논어, 맹자에까지 저작권료를 지불하는 것이 맞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고전이라는 저작물에는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이제 갓 생산된 저작물에, 그것도 진정 가치 있는 저작물인지조차도 판단하기 어려운 저작물에 재산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온당한지 숙고해 볼 일이다. 따지고 보면 온전히 한 개인만의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저작물의 재산가치 중 최소한의 일부라도 사회에 돌려주는 것이 맞다. 카피라이트의 정당성 못지않게 카피레프트의 정당성은 이런 원론적인 생각에 토대하고 있다. 문화생산자의 권리 못지않게 문화향유자의 권리 또한 존중해야 한다는 논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의 주제인 사진저작권의 문제로 논점을 옮겨가기로 하자. 사진은 본래 복제기술로 등장했다. 최초의 사진발명자로 알려진 니에프스의 사진술 ‘엘리오그라피(Héliographie)’는 석판화를 개량하는 과정에서 탄생했으며, 영국인 탈보트의 ‘칼로타입’은 한 장의 원판에서 여러 장의 인화를 복제해낼 수 있는 기술이었다. 1860-70년대의 엽서사진은 박물관에 은신해있던 명화들을 대량으로 복제하여 일반인들에게 친숙한 이미지로 바꾸어 나갔다. 나아가 1880년대에 등장한 망판인쇄와 더불어 사진이미지는 거의 무한복제가 가능할 정도로 퍼져나갔다. 사진의 기계적 복제가 예술의 개념과 기능을 변화시켰다는 벤야민의 진단도 설득력을 얻는 시대가 되었다. 한편 근래의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사진 복제의 질과 양, 속도를 비약적으로 단축시키고, 복제의 주체 또한 다양화시키며, 복제 이미지의 유통방식 또한 다변화시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복제 환경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조건에서는 누구나 쉽게 양질의 사진을 생산할 수 있으며, 반대로 누구나 쉽게 타인이 생산한 양질의 사진을 가져다 쓸 수 있다. 사실 인터넷에 넘쳐나는 이미지들은 모두 사진을 기본 단위로 삼고 있다. 그림도 사진으로 복제되어야만 인터넷에 오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인쇄매체에 실리는 이미지도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이미지의 대부분은 사진이 기본 단위이다.

사진저작권 문제는 사안별로 편차가 크고 유형도 다양하여 구체적으로 짚어나가야겠지만 지면 관계상 단순화시켜 두 가지로 구분하여 살펴보겠다. 우선 예술작품으로서의 사진저작물이 있고, 지식 정보 전달수단으로서의 사진저작물이 있다. 예술작품으로서의 사진은 ‘재산가치’를 높게 평가하므로 저작재산권의 문제가 상대적으로 첨예한 사안이다. 현행 예술제도 속에서는 인화된 사진에 에디션을 부여하여 복제품의 숫자를 제한한다. 거의 무한복제가 가능하고, 복제의 질에 차이가 별로 없음에도 그렇게 하는 까닭은 희소성을 부여하여 ‘재산가치’를 극대화시키기 위함이다. 어차피 음반처럼 대량 판매가 어렵기 때문에. 하여 작품사진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그 사진을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이나 전시장에 가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유명 사진작품을 인쇄물이나 인터넷을 통해 볼 수 있다. 가치 있는 예술품을 비록 복제의 형태로나마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보편교육의 이념을 생각할 때도 권장 내지는 후원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다고 해서 저작권을 고려하지 않고 마구 ‘퍼 나르는’ 것은 당연히 옳지 않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자면 인터넷상에서의 사진 복제는 저작재산권을 침해할 만큼 위협적이지 않다. 남몰래 감상용으로 인화하여 자기 집에 걸어놓을 정도의 대용량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상업적으로 악용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이를 걸러내는 장치는 반드시 마련되어야 한다. 하지만 빈대를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오히려 인터넷상에서의 자유로운 ‘퍼 나르기’는 해당 작가와 작품의 인지도를 높여주는 부수적인 효과를 낳기도 한다. 개인 홈페이지나 블로그에 자신의 작품을 올려놓고 자유로운 복제를 허용하는 경우가 그 예이다. 자신의 작품이 진정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면 작가 스스로 저작권의 포기를 자처하고 나서는 자세도 필요할 것이다. 나아가 용도에 따라 구체적인 사용범위를 정하여 저작권을 열어놓는 것도 좋다. 교육이나 비영리적 목적, 가치 있는 일에 쓰이는 경우라면 말이다. 오히려 문제는 고품질의 인화가 가능한 파일 상태의 사진이다. 디지털 출력이 보편화되어가고 있는 추세에서 작가들은 전시, 출판을 위해 출력소나 인쇄소에 고품질의 데이터를 맡겨야 한다. 문제는 추후 파기 상태를 확인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저자 사후 작가의 서명이 없는 고화질 상태의 작품사진이 복제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지식 정보 전달수단으로서의 사진은 좀 더 복잡하다. 이 경우에 속하는 유형들은 매우 다양하므로 우선 과거 신문, 잡지에 유통되던 저널리즘 사진으로 대상을 한정시켜 보도록 하자. 디지털 환경이 정착되어 가면서 인쇄매체를 중심으로 유통되던 저널리즘 사진은 점차 위축되어 가는 분위기이다. 현장 사진가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차치하고라도 사진을 게재할 수 있는 인쇄매체가 줄어들면서 저널리즘 사진의 종말을 거론하는 이들도 있다. 고품질의 데이터가 중요한 예술사진과 달리 지식 정보의 전달이 가능할 정도의 용량만으로도 충분한 저널리즘 사진의 경우 복제는 손쉽게 이루어진다. 또한 그런 사진을 저작물로 인식하지 않고 단지 ‘데이터’ 쯤으로 간주하는 풍토도 문제다. 지적생산물도, 예술작품도 아니며, 물질성이 없기에 인터넷 상에서 둥둥 떠다니는 한시적 이미지 정도로 인식되는 것이 이런 사진이다. 검색을 통해 필요한 이미지를 손쉽게 얻어낼 수 있으므로 이런 사진에 값을 치르면서까지 구매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이다.

이처럼 열악한 환경이 지속되면서 사진가들은 자신의 저작물에 대해 점점 폐쇄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비영리적 목적으로 활용되는 경우마저도 저작권이 침해당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유형의 사진은 본래 지식 정보의 전달이 목적이므로 사진의 유통에 대해 폐쇄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예컨대 아프리카의 기아문제나 국제사회의 각종 분쟁으로 인한 난민문제를 진지하게 취재한 사진 등은 가급적 널리 퍼져 나갈수록 좋다. 따라서 저작권 문제를 초월하여 오히려 적극적으로 복제를 독촉할 필요마저 있다. 힘들게 인쇄하여 배포하지 않더라도 자발적으로 ‘퍼 날라주니’ 얼마나 고무적인가 말이다. 어떤 점에서 이런 사진에 저작재산권을 주장하여 구매하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은 ‘타인의 고통’을 팔아먹는다는 오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으므로 이런 사진에도 재산 가치를 부여해야만 한다. 사명감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합리적인 해법을 찾아나가야 한다.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하며, 판례가 많지 않기에 시행착오도 불가피할 것이다. 차근차근 하나씩 문제를 짚어나가야 한다. 우선 당면한 과제는 인터넷상에서의 저작권을 어디까지 주장할 것이며, 어디까지 허용할 것이냐이다. 가장 광범위하게 복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구글이나 네이버, 다음과 같은 포털 사이트에서부터 우선적으로 지침을 마련해나갈 필요가 있다. 비영리적 목적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저용량 데이터의 사진이미지 저작권을 허용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저작인격권의 문제는 엄격하게 관리해야겠지만 저작재산권의 문제에 대해서는 카피레프트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유연한 태도가 필요하다. 물론 사진저작권자들은 다음과 같이 항변할 수 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진 구매가 위축되고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즉 선의의 목적이라는 구실로 공짜로 쓰겠다는 안이한 인식이 진정 가치 있는 사진이미지의 생산을 가로막고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물론 그것이 하나의 이유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포털 사이트가 이미지의 복제에 관한 구체적인 지침이나 입장을 명확히 밝히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사진 저작권자들의 권리가 바로 그 공간에서 침해당하고 있음을 안다면 그에 상응하는 해법을 내놓아야 마땅하다.

테크놀로지의 역사는 항상 지식의 공유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인쇄술이 그 예이다. 독일의 르네상스를 개척했던 알브레히트 뒤러는 가장 먼저 이미지 인쇄에 관심을 보였던 화가로 수많은 목판화와 동판화를 남겼다. 그가 이미지 인쇄에 열정적으로 매달렸던 데는 까닭이 있다. 15세기의 독일 화가들은 ‘비천한’ 직인의 신분이었던 데 비해 이태리의 화가들은 이제 막 ‘고상한’ 예술가로 인정받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 변화는 길드체제에 묶여있던 직인들 스스로 기술 지식의 습득을 통해 길드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짐으로써 가능했다. 필사문화의 시대에는 각종 지식의 전수가 비의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기술지식의 전수에는 도상을 갖춘 안내서가 중요한데, 필사본에 의존하는 경우 도상 표현이 정확하지 않아 문제가 있었다. 뒤러가 도상 인쇄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까닭도 그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습득한 지식을 다른 ‘비천한’ 직인들도 공유함으로써 신분이 향상되기를 원했으며, 이미지 인쇄는 이 변화를 가능케 해주었다. 야마모토 요시타카가 <16세기 문화혁명>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가 그것이다. 요컨대 자신이 습득한 지식, 자신이 생산한 지식을 공유하고자 할 때 혜택은 다시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카피라이트와 카피레프트가 상호보완적인 개념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저작권이 배타적인 방향으로 강화되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유연한 관점에서 접근하는 자세가 필요한 시점이다.

<계간 황해문화 2011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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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시적 의미

사진 2011/03/01 03:38
호, 새벽까지 마누라도, 딸내미도 안자고 있어 마시던 술을 더 먹게 됐다. 홀짝거리다가 오래 전 사두었으나 보지 못하고 있던 책 한권을 들춰 보는데, 술이 확 깬다. 하여 다시 촘촘히 읽는데, 음, 문제가 있다. 이영준 선생의 <사진이론의 상상력>, 첫번째 챕터인 롤랑 바르트의 <이미지의 수사>가 걸린다. <이미지의 수사학>에 대한 비판적 독해인데, '함축적 의미'라고 번역한 코노테이션의 차원, 이건 괜찮다. 그런데 '외시적 의미'에 관한 내용에는 문제가 있다.

"의미가 없는 순진한 상태를 외시의미(denotation)이라고 한다"(24쪽), "바르트가 사진의 외시의미라는 개념을 정말로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 층위로서 승인하고 있는지는 아직도 불분명하다. 사진에서 외시의미적 층위가 오로지 신화에 불과하다는 그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외시의미를 '순진무구한 아늑한 욕조'로, 또한 '의미의 에덴동산'으로 묘사했을 때, 바르트가 어떠한 문화적 의미나 지식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순수히 사진적인 이미지에 대해 향수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것이다".(31-32쪽)

이건 아마도 영역자들이 바르트 원전을 잘못 읽었거나(그렇다면 그 영문을 읽은 이영준 선생에게는 잘못이 없다, 그리고 그랬기를 바란다), 바르트의 생각을 이영준 선생이 깊이 통찰하지 못했을 공산이 크다. 물론 수많은 주석이 있고, 각자의 독해방식이 있으므로 자기 독해만이 정당하다고 고집을 피울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바르트는 '외시적 의미'에 대해 정확한 표현으로 자기 생각을 밝혀 놓았다.

아마도 '의미가 없는 순진한 상태', 이건 원전을 찾아봐야겠지만 내 기억으로는 "signifiant sans signifie", 그러니까 기의 없는 기표를 그리 해석한 것 같다. 그리고 '순진한 상태'는 "etat adamique", 혹은 "langage innocent" 등을 해석한 듯하다. 자, 그럼 이건 뭔가. 우선 기의 없는 기표(바르트는 다시 이걸 기표와 기의가 거의 동어반복적이라고도 표현하는데), 사진은 그 자체로서 지시대상과 구분되지 않으므로(준 동일성이라고 부르는, 지시대상이 사진에 뗄 수 없이 달라붙어 있는 상태), 기표 자체가 곧 기의가 된다. 그것이 외시적 의미의 핵심이다. 따라서 사진의 기표가 기의를 대신하고 있으므로 바르트는 외시적 차원에서는 기의가 없다고 표현한다. 즉 '의미(signification)'가 없는 것이 아니라 '기의(signifie)'가 없다는 말을 "의미가 없는"으로 받아들였을 공산이 크다. 세상에 의미 없는 사진이 어디 있단 말인가. 

 "순진한 상태", 이건 좀 더 복잡하다. 'innocent'는 바르트에게 오히려 '순진한'이 아니라 '무고한'이라는 의미이다. 바르트는 첫 비평집인 "글쓰기의 영도"에서부터 줄곧 '무고한 언어'의 가능성에 대해 언급해 왔다. 바르트의 생각에 모든 언어는 지시대상을 배반한다. 언어가 기호인 이상 기호가 가리키는 지시대상(사물, 유일자)과의 분리는 운명적이다. 이 분리가 생겨나기 이전의 상태를 '아담, 의미의 에덴동산'에 비유하는 셈인데, '무고함'은 바로 언어가 이런 '죄악'을 저지르기 이전, 혹은 '죄'를 알기 이전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겠다. 사진의 '외시적 의미'는 바로 이러한 분리가 생겨나기 이전의 상태, 즉 이영준 선생의 번역어를 빌자면 '함축적 의미(conotation)'의 차원으로 진입하기 이전을 가리킨다. 기표와 기의가 동일하므로 바르트 식의 '신화'(여기에서부터 의미의 간섭, 이데올로기의 정치적 개입 등)가 생겨날 여지가 없는 셈이다. 따라서 <신화학>은 '외시적 의미'나 '무고한 언어'의 차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헐, 쓰다보니 술 다 깼다.
Posted by paixa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