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홍구 <그 집>

사진 2010/12/16 23:55

* 고은사진미술관에서 강홍구 선생의 전시가 열리는 모양이다. 멀어서 가보지 못하는 대신 묵은 글 한편 올린다.


1970년대의 이른바 개발독재를 시작으로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개발 지상주의의 폐해는 우리 사회 곳곳에 어두운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다. 무분별한 재개발로 삶의 거처를 박탈당한 도시의 유민들이 늘어나고 부동산 투기 열풍은 전염병처럼 퍼져나가 도시인의 욕망은 오로지 ‘집’을 소유하고자 하는 몸부림으로 귀착한다. 한 개인에게 집에 대한 기억이 삶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다. 한 줌의 볕도 들지 않는 후미진 다락방이든, 가족 전체가 오밀조밀 붙어살아야 했던 한 뼘 남짓밖에 되지 않는 사글세방이든, 한여름에도 따가운 볕을 피할 수 없는 옥탑 방이든 유년기를 보냈던 집은 누구에게나 추억으로 남아있는 법이다. 집은 그야말로 인생의 요람이다.

지속적으로 도시 소시민의 주거환경과 재개발 문제에 천착해 온 강홍구의 신작 <그 집>은 재개발로 사라져버린 옛 집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 집들은 어느 누군가에게는 유년기의 추억이 서려있는 곳일 테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삶 전체를 의탁한 채 평생을 보냈던 곳일 수 있다. 사연이 없는 집은 어디에도 없다. 그 집들이 비록 볼품없고 실용적이지 않더라도, 언덕 꼭대기에 위태롭게 서있다 할지라도, 집에 닿으려면 산굽이를 꼬불꼬불 돌아야만 할지라도 누군가에게는 호화스런 아파트보다 훨씬 가치 있는 곳이었음에 틀림없다. 요컨대 그 집들에는 삶 전체가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다. 거칠고 투박하며 때로는 조잡스러워 보일지라도 그 집들은 자기 환경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 채 들어서 있다. 삶이 그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 집들을 오래 전부터 정직하게 ‘기록’해 왔으며, 이제 그 집들은 사라지고 없다. 남아있는 것은 집에 대한 기억뿐이다. 그 집을 거쳐 갔던 누군가가 있었을 터이므로 작가의 기억은 보편적 기억으로 확장된다. 모든 기억은 내밀함을 속성으로 한다. 하지만 사진의 기록은 “뻔뻔하고 공식적”이어서 개인의 기억을 담아내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작가는 생각한다. 그래서 흑백사진 위에 잉크와 아크릴 물감으로 덧칠을 했다. 그렇게 사라진 옛 집들은 형형색색의 지붕과 담장을 갖춘 채 새롭게 태어난다. 회색의 콘크리트 속에 파묻혀 있던 수목들도 초록을 회복한다. 인화된 사진 위에 물감을 흘리거나 획을 그어보기도 한다. 특별한 의미는 없지만 잊혀져버린 이 집들에 대한 기억을 복원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보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작가는 이 모든 행위를 다시 백지 상태로 되돌아가서 생각한다. 왜 그런가? 우선 기억을 복원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뻔뻔하고 공식적인’ 기록에서 벗어나 내밀한 기억을 담아내기 위한 방법론으로 선택한 덧칠은 사진에 일종의 ‘심미성’을 부여한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그 집들, 주인은 쫓겨 가고 다른 건물들로 대체되어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으며, 망각의 강 깊숙이 가라앉아 버린 그 집들에 심미성이 생겨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작가는 이를 “끔찍한 현실이 심미적으로 보이는 것보다 잔인한 일은 없다”고 쓴다. 결국 작가의 노동은 흉측한 현실과 심미적인 사진 사이에 깊은 균열을 남기는 것에 다름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것이 부질없는 노동, 의미 없는 행위라고 할 수는 없다. 의미는 바로 그 균열의 틈새에서 솟아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침묵은 현실에 작은 흠집 하나도 낼 수 없고 어떠한 의미도 낳지 못한다. <그 집>은 그런 점에서 의미를 향한 몸부림이라 할 수도 있겠다.

<월간미술 10월호>

Posted by paixa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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