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lyGood, Murder

사진 2010/12/01 02:09

생명주권을 빼앗긴 야생 인류의 생태학

<좋은, 살인> 연작에서 노순택은 전쟁무기의 살해 위협이 상존하는 우리 시대의 생태학에 대해 탐색하고 있다. 위험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는 위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모습은 태연자약하기 그지없어 오히려 희극적으로 보인다. 이는 그들이 전쟁무기의 실체를 망각하고 있으며, 나아가 스스로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모른 채 그 상황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각종 무기 쇼와 가상의 전쟁연습이 웅대한 스펙터클처럼 펼쳐질 때 그들은 환호한다. 그 환호성의 이면에는 가상의 ‘적’을 이 첨단 무기들이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섞여있을 것이다. ‘적’이란 개념적으로 ‘악의 축’에 속해 있어 그들과 맞선 전쟁은 ‘선한’ 행위처럼 인식된다. 전쟁무기의 강력한 화력은 선한 편의 승리를 힘들이지 않고 가져다줄 수 있으므로 찬탄의 대상이 된다. 작가의 문제의식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원한다.

전쟁무기는 생명을 살상하는 기계이다. 살상의 대상이 아군이냐 적군이냐는 여기에서 중요하지 않다. 칼 쥔 자가 누구냐에 따라 희생자가 달라질 뿐이다. 그래서 모든 무기는 양날의 칼이다. 문제는 이 무기가 자신을 밸 수도 있는 칼이라는 점을 좀처럼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요컨대 살상의 대상과 상관없이 무기란 본래 위험하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무기가 존재하는 한 생명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이 무기의 성능이 고도화되어 갈수록 위험은 그에 비례하여 커진다. 생명 주권은 전쟁무기를 생산해 내는 세계 속에서 박탈당한 상태이다.

분단 상황이 반세기 이상 지속되고 있는 우리의 상황은 명목상으로는 ‘휴전’ 상태이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단지 잠시 멈추었을 뿐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전쟁의 위험은 남아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이 연작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휴전 상태를 위기로 인식하지 않는 듯하다. 가공할 화력의 각종 무기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거나 모의 전쟁을 보며 환호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이 전쟁무기들이 자신들의 생명주권을 보호해주는 국가권력에 속해있다는 믿음에서 오는 안도감 때문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믿음에 잘못은 없다. 그러나 만약 총구가 그들 자신을 향한다면 어쩔 것인가? 기념사진을 찍어주는 아빠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아이 사진(2008, 충청도)에서처럼 말이다. 자식은 부모에게 ‘총을 쏘고’, 부모는 자식에게 ‘사진을 쏘는’ 이 장면은 언제라도 발생할 수 있는 위기상황에 대한 메타포이다. 이러한 위급한 사태는 전쟁무기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가능성으로 남아있다. 실제로 개인의 생명주권이 국가권력에 의해 위협받았던 경우는 우리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경험들로 남아있다. 그 때 무기는 살해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무기는 본질적으로 살해의 수단이지 생명을 보호하는 도구가 못된다. 또한 임시적으로 국가권력에 속해있을 뿐이지 궁극적으로는 개인들의 보호 장치가 될 수 없다.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조항에 따르자면 개인들은 이 전쟁무기를 국가에 잠시 위탁했을 뿐이다. 법의 권위를 믿어서인지 살해도구를 위탁한 이들은 그 도구가 자신들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굳이 현대사의 통렬한 경험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전쟁무기가 곧바로 모두의 생명주권을 박탈할 수 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다.

무기는 전쟁이라는 위기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 낸 도구이다. 전쟁 상황에서는 평상시의 법률적 힘이 정지하고 초법적인 질서가 들어선다. 전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초법적 질서를 지탱하는 단순명료한 논리이다. 심지어 이 단순한 질서 속에서는 모든 이의 생명은 존엄하므로 보호받아야 한다는 근대국가의 기초 윤리마저 무시된다. 하지만 실상 이러한 질서는 문명사의 초입부터 있어 온 것이다. 전쟁에서 만큼은 살해가 정당화된다. ‘합법적 살해’가 가능한 상태가 곧 전시이며, 어떤 점에서 살해는 독촉 받는다. 이러한 질서 속에서는 피아가 따로 없다. 모든 전쟁에서 가장 먼저 살해 위험에 노출되는 이들은 약한 자들이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민간인 사상자 수는 항상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다. 싸움에 가담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해서 살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결국 모두의 생명은 위기 상태에 처하는 것이다. 때로 개인의 생명은 목적 달성을 위해 언제든지 희생될 수 있으며, 그 목적에 방해가 되는 생명은 가차 없이 제거된다. 결국 전쟁 상황에서의 폭력은 용인되며, 이 정당한 폭력의 성실한 집행자는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전쟁의 질서 속에서는 폭력이 곧 법인 셈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의 잔혹성을 은폐하고 ‘합법적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 평화유지라는 허울 좋은 명분은 전쟁의 폭력을 정의로운 행위로 포장하는 전형적인 예이다. 휴머니즘의 기치 아래 타국민의 인권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우는 것 또한 그렇다. 악당을 쳐부수는 영웅의 이야기나 각종 무용담 또한 폭력을 미화시키는 장치가 된 지 오래다. 이런 정당화 담론 속에는 정의로운 폭력과 사악한 폭력의 구분이 있다. 그러나 이 구분은 전쟁의 ‘합법적 폭력’을 견고히 떠받치기 위한 책략과도 같다. 전쟁무기는 이 구분에 따라서가 아니라 자본의 논리에 따라 유통된다. 전쟁무기의 성능을 보여주는 ‘무기 쇼’는 이 논리의 정확한 반영이다. 똑같은 무기가 방어에도 쓰이고 살해에도 쓰일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방어하는 무기는 적을 살해하는 무기이기도 하다. 동일한 행위가 다른 이름으로 표현될 뿐이다. 살해를 정당화하는 ‘예외상태’로서의 전쟁에서는 모든 생명이 같은 수위의 위기 상태에 놓인다. 언제라도 살해당할 수 있는 생명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것이 곧 오늘날의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 인간은 무고하게 죽는다. 죄 없이 죽어도 항변할 수 없고, 살해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해괴한 인류 생태계이다. 동물 생태계에서는 이러한 죽음이 자연 상태를 의미하지만 인류 생태계는 그런 죽음을 추방시키는 과정을 밟아오며 이를 문명이라 불렀다. 죄가 있어야만 죽일 수 있고, 죄가 있더라도 함부로 죽일 수 없는 것이 인류 생태계의 질서였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무고한 생명을 ‘합법적으로’ 살해하는 희생제의가 그 예이다. 그런 점에서 전쟁은 희생제의와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 원시공동체사회, 고대사회에 있었던 제의의 최종 단계는 희생양을 처형하는 것이었는데, 그 때의 제물은 종종 인간이었다. 누구나 제물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제물에도 자격이 있다. ‘희생양’이 되려면 무고해야 한다. 순결하지 않은 인간, 죄가 있는 인간은 제물이 될 수 없다. 왜 그런가. 희생제의는 위기에 처한 공동체 구성원들의 불안과 폭력을 달래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모두의 분노를 제물에 집중시켜 폭력을 방출해버림으로써 평온을 되찾게 하는 것이다. 제의에서 벌어지는 처형에는 결국 모두가 공범으로 가담하게 된다. 무고한 희생양이 처형되는 과정을 목도하면서 그들은 죄의식을 느끼고, 행위를 뉘우치며, 자신들의 폭력을 참회하게 된다. 희생제의가 갖는 치유효과는 그렇게 생겨난다. 그런데 만약 희생양이 죄 지은 자라면 처형의 성격이 달라진다. 그것은 희생제의가 아니라 죄과를 묻는 합법적 처형인 것이다. 그 때 제의에 참여하는 자들은 더 이상 공범이 아니라 단순한 참관자여서 죄의식을 느낄 까닭도 없고, 폭력이 정화될 수도 없다. 전쟁도 그렇다. 만약 어떤 전쟁이 악에 대한 응징이라면 폭력은 권장될 수도 있다. 악한 자들을 살해하는 것은 그렇게 허용될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지지받는다. 면책 받은 살해인 셈이다. 그러나 선한 전쟁이란 어디에도 없다. 전시의 면책 살인은 그래서 위장된 폭력이다. 살해당할 가능성은 팔레스타인이나 중동처럼 국지전이 벌어지고 있는 특정 지역만이 아니라 이제 전 지구적인 문제로 확산되었다. 그것이 인류 생태계의 현재 상황이다.

노순택의 작업은 한국을 표본으로 삼아 이 ‘가련한 생명’들의 생태학을 탐사하고 있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인류 생태계의 그것과 같다. 전쟁무기의 실체는 은폐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망각되어 있다. 하여 첨단무기들이 본래 생명을 위협하는 도구임을 환기시켜 주기 위해 작가는 약간의 기교를 부린다. 이 기교는 사실 현실을 받아들이는 시각에 따라 동일한 현상이 전혀 다른 맥락으로 인식될 수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방법이기도 하다. 마치 똑같은 전쟁이 때로는 침공으로, 때로는 방어로 해석될 수 있듯이 말이다. 전투기의 성능을 실험하는 ‘에어쇼’는 구경꾼의 시각에서 보면 찬탄을 자아내게 만드는 장관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실전에 돌입했을 때 이 전투기들은 끔찍한 살인기계가 된다. 전투기가 구경꾼들의 머리를 뚫고 들어가거나, 가슴팍을 파고드는 장면들은 살인기계에 희생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경고로 읽힌다.

하지만 상식적으로는 무기를 장악해야 생명주권을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는 논리이므로 이를 나무랄 수는 없다. 다만 거기에는 타인을 살해해야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는 전쟁논리가 깔려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인류 생태계의 질서를 동물 생태계의 그것과 동일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가장 저열하고도 잔악한 문명사의 치부에 대해 함구하는 것과도 같다. 폭력의 제물이 되기를 원치 않는 개인은 그렇게 폭력의 집행자가 되고, 이러한 이행 과정을 통해 폭력은 끝없이 순환한다. 기관총 쏘는 연습을 하는 어린 소녀나, 아내에게 소총 사격을 가르쳐 주는 남편, 병사의 도움을 받아 가녀린 팔로 수류탄을 투척하는 여성의 모습은 폭력의 제물이 되기를 거부하는 절박한 몸부림의 변형이기도 하다. 자신을 죽이려는 살해자 앞에서 묵묵히 당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는 ‘합법적 살해’의 경우에도 그렇다. 죄 지은 자도 사형집행인 앞에서는 최소한의 저항을 하게 마련이며, 돌팔매질에는 팔을 들어 몸을 보호하는 것이 생체의 자연스런 반응인 것이다. 하물며 무고한 생명이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려 하는 자에게 폭력으로 맞서는 것은 자연스런 순리다. 그래서 이 힘없는 아이와 부녀자들은 무기 사용법을 습득한다. 폭력에 맞서는 또 다른 폭력이 악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폭력이 시작되자마자 끌려들어갈 수밖에 없는 가혹한 딜레마이다. 그래서 무기 사용법을 익히는 이들의 모습은 살해 위험에 팽개쳐진 가련한 생명들이 또 다른 폭력을 통해서만 자신의 생명주권을 지켜낼 수밖에 없는 인류 생태계의 야만적인 상태를 극명히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국가권력은 허수아비가 된다. 국가는 위기상황에서 개인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국가라는 추상을 지켜내기 위해 개인이라는 구체를 희생시키기도 한다. ‘합법적 살해’는 오히려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된다. 개인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개인의 자격으로 이루어지는 살해행위는 범죄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국가는 무엇 때문에 있는가? 개인을 합법적으로 살해하는 국가란 오히려 국민의 적이 아닌가? 허구적인 국가 권력의 울타리에 갇혀 살해 가능성 속에 팽개쳐진 가련한 생명들은 이제 야생의 자연을 떠돌아다니는 힘없는 초식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스스로 무기를 들지 않으면 생명 주권을 보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구책이 결국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그들의 운명은 오히려 가공할 파괴력을 지닌 전쟁무기들이 존재하지 않는 동물 생태계의 상황보다도 더 치명적이다. 세계 각지에서 무고한 생명들이 집단으로 살해당하는 인류 생태계의 현주소가 그 점을 반증한다.

이로써 다음과 같은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첫째, 전쟁무기는 생명주권을 박탈하며, 누구도 거기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전투기들이 마치 인체를 목표물로 삼아 돌진하는 듯한 모습의 사진은 그 점에 대한 상징이다. 둘째, 전쟁에서는 ‘합법적 폭력’이 정당화되며, 더 정확히는 ‘초법적 폭력’만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옹호를 기치로 내걸었던 근대국가와 그 유산으로 남아있는 오늘날의 국가권력은 이 지점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그 가치를 폐기시킨다. 따라서 개인은 국가권력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를 지켜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바람이자 환상에 불과하다. 그래서 가련한 생명들이다. 무기사용법을 습득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염치없는 국가권력의 초라한 한계가 드러난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전쟁무기의 가공할 화력에 찬탄을 보낸다. 무기가 ‘우리 편’의 수중에 있을 때의 안도감과도 같은 것이다. 뒤집어 생각하여 ‘적’의 무기가 강력할수록 찬탄이 공포로 바뀐다는 것을 생각하면 되겠다. 모든 무기는 ‘생각 없는’ 도구인지라 누구라도 살해할 수 있다. 이 자명한 진실을 은폐하고 호도하는 것이 ‘에어쇼’와 같은 시장논리의 마케팅 전략이다.

그렇게 해서 문제는 이제 법으로 옮겨간다. 국가와 개인의 관계는 법의 기초 위에 세워져 있다. 개인의 행위는 법이 허용하는 테두리 내에서만 가능하고 국가도 그렇다. 생명주권, 인간의 존엄성 등 인권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는 법의 제재를 받는다. 하지만 <좋은, 살인>이 줄기차게 문제 삼고 있듯이 현재의 인류 생태계는 법의 힘이 미치지 않는 영역으로 멀어져가고 있다. 인권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생명주권은 전쟁무기가 상품이 되어버린 오늘날 공허한 말로 전락해버렸다. 전쟁무기는 사용가치가 있기 때문에 생산되고, 상품가치가 있어서 판매된다. 인류 생태계의 치명적인 모순과 위선이 여기에 있다. 법은 인권의 기초 위에서 탄생했다. 그런데 이 법이 전쟁무기의 생산을 용인한다. 이 무기들은 법이 보호하고자 하는 인권의 근간을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무너뜨린다. 그렇다면 법은 무엇 때문에 있는가. 전시에 등장하는 ‘초법적 폭력’을 법이 다스릴 수 없다면 우리는 법을 폐기하고 이 ‘초법적 권력’을 따라야 하는가. 그러나 후자가 ‘선한 법’이 아님은 너무도 자명하다. 따라서 ‘초법적 권력’을 용인하는 법의 위선을 발가벗길 필요가 있다.

이 위선이 법 자체에 내재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위선은 법의 집행에서 나온다. 법은 야생의 상태에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아노미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열어주었다. 아노미 상태에 폭력성이 내재해 있다면 노모스로서의 법은 그것을 축출하고자 한다. 법이 폭력이 되는 것은 단지 법을 무시하는 초법적 권력이 작동하는 한에서이다. 모든 종류의 ‘예외상태’에서 이 초법적 권력은 법 위에 군림하여 통치의 질서를 재구성한다. 이 초법적 권력 또한 법에 의지하여 나왔으므로 법을 적용하는 척 하지만 그것이 법이 아님은 자명하다. 법의 효력을 갖되 법이 아닌 이 수상한 초법적 권력이 위선의 가면 속에 감추어진 본래 모습이다. 초법적 권력의 또 다른 이름이 바로 행정 권력으로, 전시에 발동하는 초법적 폭력의 주체이기도 하다.

초법적 권력의 작동원리를 이해하면 우리는 어째서 ‘법의 위선’과도 같은 전쟁무기의 상품화가 가능한가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우려스러운 점은 생명주권을 박탈하면서까지 법을 무시하는 이 초법적 권력, 노모스 이전의 폭력보다도 훨씬 교활하고 잔혹한 이 권력이 인류 생태계의 질서를 교란시킬 정도로 커졌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권력은 법질서의 내부에서는 권력의 힘을 행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의 효력을 일시적으로 정지시킬 수 있는 ‘예외상태’를 만들어내야 한다. 전쟁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상태를 항구적으로 유지해야만 초법적 권력의 수명이 연장된다. 따라서 무기 생산과 판매는 초법적 권력이 수명을 연장하기 위한 책략이기도 하다. 생명주권을 볼모로 삼아 자행하는 이러한 책략은 원칙적으로는 위법이다. 법의 대원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인류 생태계의 역사에서 법은 폭력과 한번도 결연하게 단절해본 적이 없었다. 법은 폭력과 내밀하게 연계되어 작동하면서 초법적 권력을 용인해 왔다. 위법을 허용하는 법, 그것이 법의 또 다른 얼굴인 셈이다. 이 내밀한 관계를 끈질기게 밝혀내고 문제 삼지 않는다면 노모스 이전의 야생 상태로 전락한 인류 생태계의 질서를 다시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생명주권을 위협하는 전쟁무기의 실체에 의문을 던지는 노순택의 작업은 그러한 시도를 향한 작은 발걸음이이다.

에어쇼를 보면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뻗은 사람들의 모습은 살인기계를 환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구경꾼의 뒷모습을 희미한 그림자처럼 촬영한 사진에는 유령과도 같은 음습한 분위기가 서려있다. 이 두 장의 사진은 살해할 수 있는 가능성과 살해당할 수 있는 가능성의 차이를 보여주는 추상적 이미지이다. 개인들에게 이 차이는 아주 크지만 실상 양자 사이에는 인류 생태계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아주 작은 차이만이 있다. 관계는 언제든지 역전될 수 있는 것이다. 무기를 든 자가 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은 높은 반면, 상대가 무기를 들었을 때 그는 즉각 살해당할 수 있는 자가 된다. 따라서 살해할 수 있는 자는 곧 살해당할 수 있는 자이기도 하며, 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살해당할 수 있는 가능성도 함께 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힘써야 하는가? 오히려 인류 생태계는 이 모든 가능성들을 최소화하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한다. 살해할 수 없을 때 살해당하지 않을 수 있다. 살해할 수 있는 생명들이 득실거린다는 것은 살해당할 수 있는 생명들도 그만큼 무수히 많다는 뜻이다. 그렇게 <좋은, 살인>은 살해할 수 있는 생명들에게 던지는 경고의 메시지이자, 살해당할 수 있는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길을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Posted by paixaube
TAG